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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한 마도사인 유미디아 대군이, 황상과 적통의 황녀를 지키기 위해 암살자들에 맞서 홀로 싸우다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대 군은 아직 서른 세 살, 젊은 나이였다. 결혼하고 한참만에 가진 아이는 아직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았다. 너무나 총명하여 이미 어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던 어린 문수궁 도령은, 그 작은 몸에는 품이 커서 맞지 않은 새카만 상복을 입고,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의 사랑을 받는 황상을 시해하려 하고, 아직 아기나 다름없는 어린 황녀까지 해치려 한 일이 얼마나 국민들의 분노를 샀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 감정에 불을 지른 것은, 바로 그 한 장의 사진이었다.

코에서 미끄러질 것 같은 안경, 작은 몸에 커다란 상복을 입고, 품에 어머니의 영정을 꼭 안고 있는 어린 문수궁 도령, 울먹이며 입술을 꼭 깨물던 시라노 상 하마드리스.

자식을 둔 젊은 어머니들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중년 남자들도, 그 사진을 보고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그 어린아이의 눈물이, 마치 산이 닿은 듯 절절하게 가슴에 남아 쓰라렸다. 남들도 그러한데, 그 아비가 그렇지 않으랴. 손을 붙잡는, 옷자락을 붙잡는 그 작은 손을 모르지 않았다. 아버지이, 말꼬리를 늘이며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는 그 눈동자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리 오려무나, 시라노."

세네카가, 붕대로 감은 손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마치 제 아이인 듯 품에 안고, 엄마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등에 업고, 네 어머니는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고 몇 번이나 속삭여 주었다. 로렌이 아이를 받아 안으려는 것을 만류하며, 세네카는 돌아오는 내내 시라노를 업은 채 먼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 아이를 낳은 아버지는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 해도 자신 역시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듯이.

그렇기 때문에, 떠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아이를 두고, 다시 오지 못할 먼 길을.

황 상께서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주시리라. 선황께서 일찌기 부모 여읜 유미디아의 어머니가 되어 주셨듯이. 세네카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주리라. 평생을 누군가의 그늘 속에서 숨쉬며, 결코 제 자식의 아비 노릇만은 해 줄 수 없을 그 남자는 시라노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이 또 한 사람의 아버지인듯 아이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잔정이 없는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가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부분까지 아이를 걱정하고 챙기며, 그는 젊은 후작 이상으로 그 아이를 사랑하였다.

그러니, 세상 일일랑 살아갈 사람들에게 맡기자. 생각하였다. 칼을 들어 목을 찌르려 하였던 것은, 그저 충동만은 아니었다. 그 누가 온전히 이해하랴. 그녀가 숨을 거둔 그 순간, 그의 심장 역시 차게 얼어붙었다고. 그 말이 그저 슬픔에의 은유만은 아니었음을 대체 뉘가 이해하랴. 살아서 숨을 쉼이 저주로 느껴지는 그 순간, 칼날이 파고든 것은 그의 목덜미를 지나는 급소가 아닌, 세네카의 손등이었다.

어찌 그리 하느냐고, 그는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새벽에도 그녀를 안았더랬다. 자기 전에도 뭔가 약품을 만졌는지, 손에서는 희미한 산의 냄새가 났지만 목욕물에도 약초를 우려내는 유미디아의 머리카락에서는 희미하고 향기로운 약초향이 배어나왔다. 하마드리스 가의 주인에게는 익숙한 그 향에 취한 채, 안고 웃고 기뻐하고 사랑하며, 한 조각 부끄러움도 없이 이 세상 오직 그녀와만 나눌 수 있는 숨결과 몸짓 속에 그녀의 품에서 안식을 구했다. 오, 마고여. 지금 이 순간 다시 한 번만이라도 그녀의 품에 머리 기댈 수만 있다면. 하지만, 돌아온 유미디아의 몸은 무참히 부서져 있었다. 형체를 갖추고 있는 것은 왼손과 얼굴 뿐, 몸은 갈기갈기 찢겨지고 내장마저 무언가로 갈아낸듯 으깨어져 있었다. 그, 관에 애써 제자리 맞추어 자리한 왼손을 집어들어 입맞추었다. 머리로 손을 뻗으려 하는 것을, 세네카는 제지하였다. 그가 유미디아의 반지를 뽑아 따로 간수하는 것을 그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죽으려 하였지만 죽지 못했다. 아이를 제물삼아 그녀의 혼을 불러들이는 극단적인 마법마저 생각하고 있었다. 식을 계산하고 마법진을 그렸다. 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댄 그 순간 아이가 보였던 표정을,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한 듯, 아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 마고여.

칼로 목을, 아이가 아닌 자신의 목을 찔렀지만,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 후작은 유미디아 대군이 자신에게 몹쓸 저주 하나를 남기고 갔음을 확신했다. 고통만이 머물다 갈 뿐, 죽는 것 조차, 그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그 사명을 다할 날 까지, 살아가는 것이 이리도 고통스러운데도. 시라노를 버리지 마세요. 아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러들어왔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냥 잊어버려라. 아이의 기억을 강제로 묶었다. 그리고 그는, 문수궁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여운국 각란성을 다시 만난 것은, 수도를 떠나기 전날의 일이었다.

물론 장례식에도 왔다 갔던 것을 알고 있었다. 황족인 유미디아의 죽음 앞에, 아무리 정적이라 해도 그가 오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가 이렇게 꽃다발까지 챙겨 들고 성묘를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도, 하마드리스 후작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알지 못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옷깃 사이로, 목에 감은 붕대가 들여다보였다. 유미디아의 장례식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칼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베어내었다. 수도자처럼 짧은 머리카락이, 그가 자신의 남은 생을 그 아내와 함께 이 땅에 묻어버렸음을 방증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시라노 저하도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그렇게, 짧게 깎은 머리카락에 먹물 들인 거친 옷감으로 지은 상복을 걸친 하마드리스 후작은, 자신의 아내를 죽인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지금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돌아서려다 말고, 각란성은 무덤 앞에 놓은 꽃다발을 흘끔 쳐다보았다. 되가져가야 하는 것인지, 이대로 두어도 좋은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하마드리스 후작은 꽃다발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아직 풀도 채 돋지 않은 새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후 각하."

"둘만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대답에 섞인 냉기에, 각란성은 더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다만 그는 하마드리스 후작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잠시 무덤을 바라보다가 두 번, 깊이 머리를 숙여 절할 뿐이었다.

" 그래야만 했습니까."

돌아가려던 각란성을 붙잡은 것은 그 말이었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습니까."

"대후 각하."

"죽인 여자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놓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내가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뒤에서 일을 꾸몄는지...... 모를 것이라 생각합니까."

젊은 마도사의 깡마른 손등에 핏줄과 힘줄이 도드라져 올라왔다. 각란성은 눈을 감았다. 이 자리에서 맞아도, 그 손에 목이 졸려도 할 말은 없다. 숫자로만 이루어진 차가운 세상에서 스스로를 고독에 가두었던 그 남자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하고 이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었던 단 한 사람. 여운국 각란성이 제 손으로 부스러뜨린 나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빛나고 아름다운 이. 이 나라의 대군이자, 황제가 섭정으로 지목한 황족이며,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 대후의 아내 되는 이. 시간의 마녀.

그런 여성을, 죽여 없애기 위한 판을 깔았다.

그의 주군이 원했던 것 역시, 황제가 아닌 유미디아 아라스 대군의 죽음이었기에. 아니, 루비나 준왕의 핑계를 댈 이유도 없다.

-그대와 내 인연은, 아마도 처음부터 그런 것이었을테니.

그 차운 웃음, 자신의 앞날을 정확하게 내어다보고도 흔들리지 않던 눈빛.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죽음 뿐이었지만, 그것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손에 넣고 싶었다. 무엇을 바랐을까. 무엇을 바란 것일까. 각란성은 슬며시 눈을 떴다. 처음으로 보는 태양처럼,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보지 못할 것을 보았다. 아니, 보아서는 안 될 것을.

손톱이 손바닥을 파들어가도록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돌린, 마이렌 상 하마드리스의 뺨에 흐르는 한 가닥 눈물을.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까."

대답하지 못한 채 머리를 숙였다. 하마드리스 후작은, 그가 유미디아 대군의 무덤 앞에 놓아 둔 꽃다발을 집어들었다. 꽃송이를 꺾어, 꽃잎을 아내의 무덤 위에 흩뿌렸다. 벌건 흙이 드러난 그녀의 무덤을, 그 꽃잎으로 덮으려는 듯이.

"남의 아내 된 이를 사랑하는 것이 온당치는 않겠습니다만......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까."

"대후 각하......?"

"그렇게밖에는 가질 수 없으리라 보셨습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입으로는 무어라 말하건."

하마드리스 후작은, 꽃잎으로 뒤덮인 유미디아의 무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에 물기가 어려, 희고 노란 꽃잎들은 물 묻은 붓으로 덧칠하듯 번져 보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당신의 눈은 늘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유미디아 아라스 대군을 사모하였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