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자부 지하 문서고 옆방에 가득 들어있는 독에서 살고 있는 아기 귀신이며 처녀 귀신들은 한달에 한 번 독에 바람이라도 쏘여준다며 청소를 하러 오는 독각을 퍽들 좋아하였지만, 독각은 처녀 귀신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굶거나 병들어 이 풍진 세상에 원념 가득한 손가락 하나 남기고 죽어가는 아기 귀신들이야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 사람이 보지 않을 그런 시간에 옥상에들 데리고 올라가 독을 잘 말려주고, 밤에는 별빛 달빛 쐬어 주고 데리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지만, 처녀귀신들은 아기들처럼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오히려 처녀귀신들은 걸핏하면 독각을 놀리려 들었다. 아니, 요새 말로는 성희롱 내지는 성추행을 하려 들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도깨비도 남자라고.
사실 도깨비는 양기가 강한 편이니 아주 헛물을 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어도 상대는 가려가며 그런 희롱을 해야 할 게 아닌가.
“노, 놓으십시오, 낭자!!!!! 나는 정인이 있단 말입니다아아아아아아!!!!!!!!!”
개화기에 태어난 주제에 청자의 수준에 맞춘 발화를 해야 한다며 나름대로 조선시대스럽게 말을 구사하려 애쓰던 이 가련한 도깨비는, 장장 300년이나 묵어 이제는 처녀귀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오호호호호~ 하는 초음파 공격은 물론 폴터가이스트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몸이 된 왕언니에게 깔려, 그 정숙하기 그지없는 넥타이 매듭을 풀릴 지경에 놓였으니. 귓불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품이 평소 하던 행실과 상관없이 후끈 달아오르기는 한 모양이라.
“이번에야말로 오랜 숙원을 풀 수 있게 되었구나.”
왕언니가 중얼거리자, 여기저기에서 웃음 소리가 났다. 김연아 뺨치는 트리플 러츠에 에스퍼맨이 울고 갈 덤블링을 선보일 줄은 알아도 형체가 없는 귀신의 몸으로 손을 쓴들 곰손이라 다행히도 넥타이는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이대로 제대로 포장 풀었다가는 하나 둘도 아닌 저 많은 처녀귀신들에게 문자 그대로 잡아먹힐 지경이라, 독각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왜, 왜들 이러는 겁니까!”
“왜들 이러기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 는 것이지.”
“그건 공리주의적인 주장이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 성추행에 해당하고……!”
남자에게는 성폭행이 적용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불합리한 법률에 근거하여 독각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똑바로 말했다. 그러나 300년 굶은 아가씨에게 그런 말이 들릴 리 없다.
“300년을 살면 보고 들어 아는 것도 많아, 도깨비라는 족속들이 얼마나 색을 탐하는지는 능히 알고도 남지. 너도, 정숙한 척 그리 살고 있지만 사실은 불끈불끈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면서?”
“행자부에 도깨비가 저 하나 뿐인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제게 이러는 겁니까!”
“어머, 아무리 굶어도 먹을 것은 가려먹어야지.”
오호호호 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아아, 대체 멀리서만 보아도 힘좋고 오래 가게 생긴 미스터 김을 두고, 왜 나란 말인가. 허연 적삼의 깃 사이로 둥글둥글 무덤같은 가슴팍이 보이는 터라, 독각은 못볼 것을 본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도리질을 쳤다. 당신은 인간, 나는 도깨비라고. 그런 마음으로 계속 참고 참고 참고 또 참아오던 마음이 이런 식으로 더럽혀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반 선생님. 앙다문 어금니 사이로 그리운 이름이 새어나왔다. 그때였다.
“……이놈의 귀신 바가지들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나.”
낮은 휘파람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다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인가 하는데 또다시 낮은 휘파람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어찔했다. 블라우스 위에 사무실에서만 입는 큼직한 니트 가디건을 걸친 다인은 제 원드를 손에 쥔 채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전부터, 저건 내 꺼니까 건드리지도 말라고 했냐, 안 했냐.”
“그치만……”
“어디서 내 레어 아이템, ‘동정 도깨비’를 손대려 들엇!”
뭔가 이유가 미묘하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능숙하게 낮은 휘파람 소리로 처녀귀신들을 옭죄던 다인은 평소에 그녀들을 담아 두던 장독에 한번에 처녀귀신들을 쑤셔넣고 뚜껑으로 눌러 덮었다. 그리고는 가져온 금줄로 칭칭 동여매어 당분간은 바람도 쏘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바닥에 구겨진 채 떨어진 겉옷을 집어들며 다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독각은 얼른 넥타이를 고쳐 매었지만, 붉어진 얼굴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디서 저런 처녀귀신들한테 당하는 주제에, 사람을 지켜주고 어쩌고 어째?”
“저는……”
“하나도 안 미더워. 못 미더워서 이걸 어쩌냐.”
독각에게 옷을 건네주고, 다인은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등허리에는 옥상의 흙먼지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네까짓 놈에게 준다고 빼빼로를 사온 내가 미친 년이지.”
“………………..예?”
“5초 걸렸어.”
“……?”
“빼빼로, 라는 말을 알아듣는데 5초가 걸리냐, 이 바보 도깨비 같으니.”
다인은 가디건의 주머니를 뒤져, 포장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는 그냥 평범한 빼빼로 한 곽을 꺼내어 뜯었다. 그리고는 속봉투 하나를 뜯어 손잡이 쪽을 통째로 독각의 반쯤 벌린 입에 쑤셔박듯 집어넣었다. 독각은 그 갑작스런 상황 앞에서, 그저 멍한 듯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아……”
“나보고 300년 묵은 아줌마들이랑 충치균을 공유하라는 거야, 뭐야.”
“……에?”
차마 우적우적 씹지도 못하고 빼빼로를 물고 있던 독각은, 갑작스레 저를 감싸는 익숙한 겐조의 향기에 그만 물고 있던 빼빼로의 절반 정도를 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그 찰나의 순간 그의 어깨를 붙잡은 아찔하도록 고요한 침묵에, 독각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바보냐!”
“……아닙니다.”
꿈이라고 하면, 이건 정말 악질적이도록 달콤한 꿈이다. 독각은 입에 묻은 빼빼로 부스러기들과, 초콜렛의 흔적을 만져보았다. 만약에 이런 것이 꿈이라면. 독각은 씩씩거리며 먼저 돌아가는 다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제 손에 묻은 것이 그저 빼빼로 부스러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펄인가.”
엷은 분홍빛의 펄자국. 불빛 어지러운 서울의 저녁 하늘 아래, 그의 손끝에 반짝이는 것은. 독각은 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천천히 숨을 쉬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공기가 희박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그에게는 본래 피를 돌리는 기능만 남아있는, 가끔은 있는 지도 알 수 없는 허깨비같은 심장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독각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꽁꽁 묶여 있는 장독 쪽을 돌아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저것은 내일, 공익이건 무엇이건 다른 사람을 시켜 단속하는 것이 옳을 듯 했다. 그는 도깨비였다. 그는 도깨비였지만.
“반 선생님……”
이 순간이 꿈이라고 해도, 혹은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웃고 넘긴다 해도.
하늘보다 땅에 더 많은 별이 뜬 이 도시에서, 도깨비는 가만히 손을 모았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무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에게 절망만을 남긴다 해도.
“흐응.”
“……”
“다 봤는데, 어떻게 한다?”
“무슨 뜻입니까.”
11월이면 보통의 인간들은 꽤 춥다고 여길 만한 날씨인데, 트렌치 코트 안쪽으로는 여전히 엉덩이나 겨우 가릴 만큼 짧은 가죽스커트에 하얀 셔츠 한 장 뿐인 여자는, 독각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홍 선생님.”
“후회할 거라고 내가 경고했을 텐데?”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여자는 긴 손톱으로 제 셔츠의 단추를 두 개 풀어내며 물었다.
“정말로? 너같은 도깨비에 비하면 무서울 정도로 빨리 늙고 빨리 죽어버리는데, 그래도 말이야?”
독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자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보여줄 미래에 다인은 없다는 것도. 그래서 그는 돌아섰다.
“기다려, 독각.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너는 아직……”
“당신만큼 오래 살지 않았으니까,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만.”
독각은 장독 뚜껑을 손으로 툭 치고 지나가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당신도 잊고싶지 않은 추억 하나 정도는 있을 게 아닙니까. 효언(孝彦) 어르신의 일도 그렇고.”
“어린 도깨비가.”
여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고 자시고…… 뭐, 언젠가는 스스로 깨닫게 될 걸. 나는 몰라.”
단추를 여미며, 여자는 장독을 툭툭 걷어찼다. 안에서 처녀귀신들이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달빛 아래, 처녀귀신들은 더욱 요기를 띠고 날뛸 것이다. 뭐, 그렇지 않아도 음기 충천한 것들이니, 오늘 같은 날이 아니더라도 군침이 돌 것을 달까지 저리 떴으니 독각을 덮치려 한 것도 이해가 아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에잇.”
잔소리하는 것에도 흥미를 잃은 여자가 다시 도시의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독각은 꿈틀거리는 장독과, 하늘에 뜬 둥근, 엄지손톱같은 달과, 그리고 손가락에 묻은 흔적을 바라보다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날도 추운데 거기서 쓰러져 자느냐고, 다인은 어서 내려오라 소리부터 지를 것이다. 계속, 멈추지 않고 울리는 휴대전화의 진동을 느끼며 독각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자꾸만 심장이 홀로 내달려,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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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한 신 캐릭터(?)는 영국에서 온 아가씨. 인간은 아닙니다. ^^;;;
월하의 동사무소
다인독각, 빼빼로 데이, 월하의 동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