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만화 좀 보여달라는 사람을 계속 거실에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도 내 방에 순정만화는 널렸지만, 책상 위에 있는 원고를 생각하면 그대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 만화책은 방에 있긴 한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요.”
“할 일?”
“그게…… 누나 방이 작아서 내 방에 만화책을 꽤 갖다놓긴 했는데…… 누나가 좀 예민해서 여름에는 나도 근처에 못 오게 해요. 아침저녁으로 샤워하거든요.”
“오케오케, 알았어요. 세수라도 해야겠네.”
“예, 그러는게 좋을 것 같아요. 기분 나쁜 거 아니죠?”
“기분 나쁘긴요. 우리 누나도 맨날 그러는데요, 뭘. 화장실 좀 쓸게요.”
그렇게 이 선생을 일단 화장실로 치워버리고.
나는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들어가, 하던 원고를 싹 쓸어서 서랍에 처넣고 잠갔다. 잉크며 펜이 굴러다니긴 했지만 그 정도야, 누나가 아무데나 떨구고 다녔다고 우겨도 상관없을 것이고. 나는 대충 방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좀 아까까지 뒹굴던 이불을 발로 대충 말아 구석에 밀어놓았다. 누나야 당연히 없을 만 했지만, 오늘은 엄마도 안 계셔서 다행이다 싶었다. 공연히 쓸데없는 말 나오면, 서로 큰일일 뻔 했잖아. 에,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연지 이야기라든가.
하아.
연지 생각을 하니까 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하다. 이거 진짜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근데, 그렇게 대형사고를 쳐 버리면 어떻게 해요.”
“윽……”
아니, 그러니까 이 선생이 와서,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안 하고 넘어갈 리가 없다니까? 그것도 이, 곰같이 생겼으면서 생긴것과 상관없이 순정 매니아인 이 남자가!
“뭐, 고 3이니까 몇 달만 기다리면 되잖아요.”
“아니 무슨 말을 어떻게 들은 겁니까? 내가 당했다니까요?”
“마 선생 같으면.”
이 선생은 이번 달 키싱유를 손에 든 채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내가, 여자애한테 학교에서 당했다고 그러면 믿겠어요?”
“아니, 난 정말이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날 보고 말해 봐요. 내가 여자애한테 당했다고 하면 믿겠냐고요.”
“이 선생은 어떨지 몰라도 난 사실이라니까요?”
“마 선생하고 나하고 차이가 뭐예요?”
물론 아무리 나라고 해도, 산도적같은 당신과 가늘가늘한 나는 다르다고 면전에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체육선생을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애는 없어요! 하지만 군대도 안 다녀온 화학교사라면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어허, 어차피 성인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그야말로 여자애가 장미란이라도 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하다고요! 이 사람 왜 내숭이야, 당신도 즐겼으면서!”
“강제로 당한 사람에게 당신도 즐겼으면서라니, 그런 마초같은 말이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긴, 상식적으로 생각하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학주에 교장에, 다들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지.”
아니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당한 나도 황당하니까. 근데.
“그래도 걱정 말아요. 난 마 선생 응원하니까.”
“예에?”
“마 선생 응원한다고요.”
잠깐, 그러니까 내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바에 대해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긴 한데,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는 선생이고 그녀석은 제자인데 학교 안에서 제자가 스승한테 그러고 있는 상황에서 나한테 와서 응원한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슨…… 아니, 그 이전에 당신도 선생이잖아! 이런 거 응원하면 안 되는 거잖아! 어쩔 생각이야!
“그야말로 순정만화네. 사제 커플이란 원래 로망이에요. 아사렐라와 엘리후! 이비엔과 크로히텐! 총각선생님은 여고생의 영원한 공략가능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왜요. 난 황금새의 전설 볼 때에도 남주는 갖다버리고 하마드리스 후작이 다스카랑 잘 되기만 빌었다고요. 그거 봤어요? 월하동 작가가 쓴 건데.”
“당신 대체 어디까지 읽고 다니는 거야!”
하고 손을 저으며 뒤로 물러서는데, 그 서슬에 책꽂이에서 만화책이 우르르, 내 머리통 위로 자유낙하를 하였으니.
“괜찮아요?”
“……괜찮아야죠.”
“근데……”
머리 위로 낙하한 책들을 주워 모으다가, 이 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롤러코스터는 같은 게 이렇게 많은 거예요?”
“예?”
“아니, 다른 만화는 다 한두 권씩 있는데. 롤러코스터만 유독 많다 싶어서요. 1권이 여덟 권이고 2권이……”
“아, 그게……”
“그럼 역시 소문이 사실인거예요?”
“무슨 소문요?”
“키싱유의 ‘저주받은 오른손’ 마영진 기자가, 스토리작가 마태오라는 소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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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