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화탄소의 분압이 뭔지 모른다고 목이 졸려 죽는 꿈을 꾸었다.
악몽 치고는 좀 웃기는 악몽이었다. 이유 하고는. 설게 잠에서 깨면서도 히죽 웃을 만큼 웃기는 꿈이었다. 그런데다 웬만하면 죽는 느낌까지 생생한 꿈은 꾸기 힘든데.
“좋게 말할 때 일어나시지.”
이모가 흔들어 깨우지 않았으면, 아예 꿈 속에서 죽을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도 들어서 좀 아까웠다. 사춘기라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죽음 자체는 궁금했다. 오늘 같은 꿈은 아니지만, 자주 꾸는 소위 ‘키 크는 꿈’을 꿀 때는 더욱 그러했다. 이모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고막을 때리는데, 정현은 겁도 없이 둘둘 말린 이불을 끌어안으며 몸을 돌렸다. 어째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잠이 더 는 것 같다. 키가 크려면 잠을 자야 한다는 말도 있으니 이럴 때는 1분이라도 더 자야 할 것 같긴 한데, 대한민국의 평범한 고등학생이 고작 키 조금 더 크자고 그렇게 퍼잘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
“대체 몇 번째인지 알고나 이래? 일어나, 일어낫!”
이불이 휙 말려 올라갔다. 이불을 빼앗긴 서슬에 설핏 눈을 뜨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영이 앞머리를 잡아 흔들었다.
“이씨, 뭐야!”
“이모한테 하는 말버릇 봐라.”
손바닥이 이마를 찰싹 때렸다.
“머리 뽑지 마! 대머리 되면 어쩌려고!”
“그게 남씨네 탓이지 이씨네 탓이냐? 일어나!”
정현의 이모인 도영은 올해 서른 아홉 살, 그러나 겉보기로는 3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다, 손대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며 성공의 탄탄대로를 달리는 끝내주게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 독신 귀족, 소위 골드미스였다.
물론, 사람의 능력과 인격이 그대로 비례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좋은 메롱작가란 죽은 메롱작가 뿐이지.”
맛있는 아침을 먹으며 저렇게 말하고.
“마감 어기는 작가에게 인권이 왜 필요하겠어?”
퇴근하여 조카와 함께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 우아하게 러시안 티를 마시다 말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말을 하는 바로 이 사람, 이도영이야말로 이슈, 윙크, 파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내 1위의 순정만화잡지 Seeds의 편집장이기도 했다.
“대체 잠 귀신이 붙은 거냐? 어떻게 깨웠더니 또 자고 깨웠더니 또 자고.”
“……성장기라고요.”
자꾸 감기는 눈을 슥슥 비벼 떼며 정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창 자라는 고등학생에게 잠이란 원래 자도 자도 부족한 것인데다, 식탁 앞에 앉아서도 잠이 쏟아지는 것이 아무래도 봄이라 더 그런가보다. 하지만 대한민국 고등학생의 현실이란 봄이라고 이렇게 졸리면 졸렵다고 마음껏 쿨쿨 잘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것도 아닌데다, 하물며 현재 정현의 보호자는 여기 있는 강철의 편집자, 정현의 막내 이모이기도 한 이도영씨다. 원래 멀리 있는 쓰리스타보다 가까이 있는 병장이 더 무서운 법이라, 그런데다 외교관으로 외국에 가 계신 부모님 대신 자신을 돌봐주는 이모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무서운 사람인데야.
“으, 으아악!”
정현의 인생이 어찌 편할 수 있으랴.
“으악은 무슨 으악이야! 잠 깨!”
“깨, 깼다고요!”
“깨긴 뭘 깨. 또 조는 것 내가 봤는데.”
깨려고 용을 써도 쏟아지는 수마에, 도영은 마침내 마수를 뻗어 공격해왔다.
……고 말한다면 과장일지 모르지만, 어쨌건 엄지와 검지를 딱 붙였을 때 손등에 올라오는 근육에 대해 남자들은 다 알고 있다. 손가락 악력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는 이 근육의 존재감이야말로, 또래의 남자애들이 서로 쳐다보며 ‘이 새끼 야동을 얼마나 본 거냐’며 미묘한 미소를 흘리게 하기 충분한 것이지만, 당연한 말로 이 근육은 사실 야동에 심취한 남고생보다는 폭주 기타리스트나, 샤워기 대신 바가지를 써야 하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나, 하여간 인생이 서바이벌인 경우에 더 발달하기 마련이다.
물론 늘 교정지나 필름을 들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말 안 듣는 작가를 휘어잡을 근성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새벽 죽도를 들고 빠른머리 천 번을 우습게 해내는 잡지 편집자의 손이라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출판사에 입사하여 편집자로 뼈가 굵은 도영은, 편집자가 된 이후로 15년, 검도를 시작했을 때부터 세면 20년을 단련한 근육의 힘을 적절히 사용하여 조카의 뺨을 잔인하게 꼬집어 뜯었다.
“으아아아악!”
“엄살 피우지 마!”
대체 어떻게 이모가 우리 엄마 동생인지 모르겠어. 대충 씻다가 물이 닿으니 쓰라린 게, 손톱이 제대로 파고들었구나 싶었다. 평소에도 꼬집기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심해서, 잘 하면 Seeds의 마감이 끝나는 금요일까지 계속 빨갛게 남아있겠다. 씻고 나와 밥 먹으러 앉았다가, 정현은 식탁 앞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며 투덜거렸다.
“흠집 났잖아.”
“흠집같은 소리 하네. 밥이나 먹어.”
뭔가 반항하고 싶었지만, 눈 앞에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보니 할 말이 수그러들었다.
평소같으면 아침으로 빵에다 우유나 얻어먹으면 감사하겠지만, 도영은 마감 때문에 집을 비우기 전에는 꼭 신경 써서 아침을 차려 주었다. 정현은 윤기 자르르 흐르는 갓 지은 밥에 된장찌개를 게눈 감추듯 먹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모는 집안일 진짜 못하면서 찌개는 맛있단 말야.”
“내가 집안일을 뭐.”
“오늘도 수채구멍에 머리카락……”
“사내새끼가 쪼잔하게. 아, 밥이나 먹어!”
“비결이 뭐냔 말야. 찌개 맛있다고 그러는데 왜 소리질러?”
“냉장고에 버섯야채된장 있어.”
“…….응?”
“이모의 손맛이 그리우면 그거 한 숟갈 넣고 대충 끓여먹어. 아, 뭐야. 저거 뉴스 언제 돌렸어?”
“내가 안 돌렸어.”
“그럼 누가 돌려?”
도영은 소파 구석에서 리모콘을 찾아내어 늘 보던 아침 뉴스를 찾아 틀었다. 아침부터 해운대 바닷가가 나오더니만, 흉흉한 뉴스가 들려왔다.
“……부산 해운대 경찰서에 따르면 어제 오후 6시쯤 해운대 모 횟집 건물 뒤쪽에서 청색 비닐포대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의 사체가 들어있는 것을 횟집주인 52세 박모 씨가 발견해 신고했습니다. 이 사체는 부산 모 고등학교 교복을 착용한 상태로, 머리와 양 팔이 잘려나간 상태로 심하게 부패되어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침부터 우울하게.”
“시끄러, 좀 듣자.”
“경찰은 이 남학생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인적사항 및 주변 교우관계와 원한관계를 파악하는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하였습니다.”
그런 상상만 해도 흉악한 살인사건 이야기를 들으며 도영은 식탁 옆에 매달아놓은 메모지에 또 뭔가를 휘갈겨 적었다. 아마도 스토리가 막힌 작가에게 던져줄 소재수첩에 뭔가 추가하려는 모양이다.
“그냥 이모가 만화가 하지.”
“만화는 좋은데 그림이 안 되잖아. 그리고.”
“그럼 스토리, 요즘은 스토리 작가도 많잖아.”
“난 아이디어는 많은데 그걸 죽 이어서 쓸 능력은 없다네. 그냥 작가들 아이디어 궁할 때 팔아먹는 게 훨 낫지. 근데 너, 아까 잠꼬대 심하게 하던데.”
“꿈 꿨어.”
“뭔 꿈? 늘 꾸던 거?”
“말고.”
“그럼 뭐. 뭔지 몰라도 이불 끌어안고 살려주세요 그러고 아주 구경하기 재미있더라. 뭐냐.”
“……이산화탄소 분압을 모른다고 목졸라 죽이는 꿈.”
“어, 그거 좋네. 근데 분압이 뭐야?”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며 도영은 또 좋다고 고개까지 끄덕거려 가며 메모를 했다.
“그나저나 너 아침 잠 말인데, 그래서 이모 없는 동안에 학교는 가겠냐?”
“걱정하지 말라니까 자꾸 그래.”
“걱정을 안 시켜야지. 식탁 앞에서까지 자고. 일어났다고 대답 뻔히 해 놓고 가 보면 또 자고 있어, 어? 이모가 한가하냐? 아침에만 수십 번은 깨우는 것 같네.”
“난 그런 적 없어.”
“없긴, 이불 감고 누워있는데 가서 말 시켜보면 깨어있을 때랑 똑같은 목소리로 대꾸하는데. 지능범 같으니. 내가 이래서, 마감 칠 때 마다 불안하다니까.”
“걱정 마세요. 지난 번에도 지각 안 했잖아.”
“이모 없을 때만 잘 하지 말고 제발 평소에도 좀 그래봐라.”
“예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정현은 칫솔을 입에 물었다.
잔소리도 많고 터프한 도영을 볼 때마다, 도영은 그녀가 자신의 엄마와 자매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조신하고 우아한 외교관 부인과, 이모의 말에 따르면 마감이라는 것은 지키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 생각한다는 저 수많은 만화가들과의 마감 전쟁을 치르며 국내 3대 순정지로 꼽히는 Seeds의 편집장까지 된 도영과는 살아온 세계 자체가 다르겠지만.
아니, 잡지 편집장이라고 다 저런 것은 아닐 거다. 칫솔까지 깨끗이 헹구고 나와 가방을 챙겨들며, 정현은 무려 시부모 상을 당한 작가에게 쳐들어가 조문을 하고 바로 콘티를 요구했다는 도영의 전설적인 일화를 떠올렸다. 아, 진짜. 우리 이모지만 인간이 아니라 저쯤 되면 작가를 잡으러 온 터미네이터라니까. 정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영은 작가를 믿지 않았다. 만화를 사랑하니 그 일을 하는 것이고, 가끔 나타나는 천재들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며 원석과 같은 천재가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작가가 마감 날짜를 알아서 지킨다거나 하는 기적은 애시당초 믿지도 않는 것 같았다. 지난 겨울에는 시크릿인가 하는 요상한 책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만, 간절히 원하고 끌어당기면 우주가 그 소원을 이루어준다든가? 그런 말을 하면서 ‘작가들이 마감을 잘 지켜서 너무 행복하구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역시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그냥 듣기에도 요상하다 했지만 설령 시크릿이라는 책에 적힌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작가와 마감과 편집자의 그 애증의 관계까지 역전시키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도영이 ‘나의 웬수들’이라 부르는 작가들 중에도 ‘진짜 강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얼마나 마감을 안 지키면 그런 소리를 들을까. 정현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아까 대충 빗질해서인지 삐죽하니 뻗친 머리를 다시 빗어내리며 생각했다. 우리 이모에게 진짜 강적이라고 불리는 작가는 바보가 아니면 부처님이겠지. 그 구박을 받으면서 왜 이모랑 일한담. 내가 작가라면 Seeds에서 일 안 해. 어디의 정신나간 작가들이 우리 이모같은 사람한테 쥐어 살면서 만화 그리는 걸까.
“아, 정말. 문에 체인은 또 왜 채웠어.”
습관처럼 현관문을 확 잡아 여는데 단단히 채워진 체인에 문이 걸렸다. 지금 나가면 살짝 빠듯한데, 다시 문을 닫았다 열며 정현은 짜증을 냈다. 도영은 정현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탁 붙잡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이 험한 세상에 여자 혼자 사는 게 만만한 일인 줄 아냐?”
“뭐야, 이모. 이모가 아직도 청춘인 줄 알아.”
“시끄러워. 돈 필요하면 어디 있는지 알지?”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사흘치 반찬 냉장고에 있으니까 그 사이에 식중독 일으키지 말고.”
“예에.”
“지각하지 말고. 아참, 이걸로 머리 깎아.”
그 뒤에 따라오는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정현은 이모가 건네는 만 원짜리를 얼른 받아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감 끝나고 왔는데 여전히 그 꼴이면 내 손으로 머리를 밀어주마.”
“……다녀올게요.”
정현은 서둘러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짙은 잿빛의 문이 닫히며, 어째서인지 아득한 어둠을 본 것만 같았다.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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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말할 때 일어나시지.”
내가 또 꿈을 꾸고 있나. 정현은 애써 눈을 뜨며 생각했다. 성장기 고등학생이란 자도 자도 잠이 부족한 상태, 누가 깨워서 억지로 일어났다가도 어디다 뒤통수만 대면 또다시 잠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사당오락이라는 말이 버젓이 학교 급훈으로까지 붙어있는 이 살벌한 나라에서, 정작 그 아이들은 고3 잠자는 것은 며느리도 모른다고 낄낄거리지 않나.
살벌하고 끔찍하며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러니까 이산화탄소 분압…… 이 아니라.
그래, 무슨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그런 꿈. 괴물인지 악당인지가 나오고,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그에 맞서 창을 휘두르고, 멀쩡한 사람이 미술실의 석고상처럼 굳어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만화 같은 꿈이었다. 아, 그렇지. 아침부터 토막살인 같은 뉴스나 들으니까 그런 꿈을 꾸지.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애가 꼭 선우 륜처럼 생겼단 말야.
아, 그래. 선우 륜.
생각이 그에 미치자, 정현은 자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원더걸스니 소녀시대니 카라니, 같은 반 녀석들이 열광하는 애들은 따로 있었지만, 그런 아이돌 가수는 정현의 관심 밖이었다. 아직도 인기 차트에 올라가 있는 한국 음악보다 프랑스에서 듣던 것에 더 귀가 끌리다 보니, 그런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 가수 본인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가질 일이 없었다. 뭐, 별다르게 튀는 짓을 하지 않아도, 한국 아이돌도 아닌데다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의 부인인 카를라 브루니의 음악을 듣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특이한 스타일이라는 소리를 듣는데야 할 말 없었지만.
어쨌건 정현의 PC와 휴대폰 바탕화면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것은, 소녀시대도 원더걸스도, 그렇다고 문제의 카를라 브루니도 아닌, 저 선우 륜이었다.
중학생의 나이로 삼성화재 배 세계바둑대회에 첫 참가하여 쟁쟁한 프로들과 당당히 맞서고 준결승까지 올라간 천재소녀. 이 나이에 바둑이라고 하면 또 영감 소리를 들을 테니까, 그런데다가 다른 애들이야 당연히 천재 바둑기사 같은 것에는 관심 없을 테니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정현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바둑 마니아로, 한국에서는 바둑 TV로 방송된 내용을 보기 위해 친구분들에게 부탁하여 녹화물을 받아보시던 아버지와, 아버지 곁에서 그 숨막히는 대국을 지켜보던 그 가슴 떨리던 순간을.
“잘 하는구나. 아주.”
“……”
“저 애가 너와 동갑이다. 이번이 첫 참가라는데.”
세필로 그린 수묵화처럼 정갈한 여자아이가 단아하게 앉아, 세계에 맹위를 떨치는 젊은 프로기사를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우던 모습을. 고작 반 집 차로 패하는 것을 확인하였을 때에는 정현의 가슴이 다 내려앉는 듯 했다. 그날 이후로 정현은 그 선우 륜이라는 여자아이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그 아이에 대해 알고 싶어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선우 륜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이 없었다.
재미교포라는 것, 어머니는 한국 사람으로, 일찍 돌아가셨지만 세계적인 학자였다는 것. 지금은 미국에서 어머니의 친구인 후견인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는 것. 그 뿐이었다.
그런 여자아이가 제 키만한 창을 휘두르며 싸웠다. 꿈도 참, 이왕 선우 륜이 나오는 것 좀 멋있는 꿈도 좋잖아. 이게 다, 윤호 녀석이 억지로 읽으라고 보여준 판타지 소설 때문이다. 괜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대통령 꿈을 꾸면 로또를 사라고 하는데, 선우 륜이 꿈에 나왔으면 뭘 해야 하지.
“아, 이거 빠져갖고. 언제까지 자려고 그래?”
그 순간 뒤통수에 떨어지는 짧은 통증에 정현은 눈을 떴다. 으하하 하는 웃음소리, 빼곡하게 판서가 적힌 칠판. 집이 아니었다. 이모가 깨우는 것이 아니었다. 아뿔싸. 고개를 들자, 담임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뒤통수를 콩 쥐어박았다. 앞자리에 앉은 놈이 한 마디 했다.
“남정현 넥삼이랑 같이 왔는데요.”
“어, 그래? 괜찮아?”
“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버스 사고 때문에 참…… 그래도 우리 반 놈들은 무사해서 다행이다.”
“아…… 예.”
버스 사고라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까의 꿈 이야기와 겹쳐서 혼란스러웠지만, 어쨌건 긍정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인 듯 하여 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학교에 오다가 윤호를 만난 것 까지는 현실이고, 그 다음에 차 사고가 난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요상한 꿈도 꾼 것이고. 정현은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윤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책가방은 제 자리에 걸려 있었다. 병원까지 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핑계로 양호실에라도 가 누워 있는 모양이지.
“어쨌건 당분간 조용히 지내야지, 3학년 중에 죽은 사람도 있고 해서 학교 분위기가 좀 그러니까, 다들 조심들 해라.”
“예.”
누가 죽었다고?
그 사고로 사람까지 죽었다는 말인가. 얼마나 큰 사고였는지는 모르지만. 잠이 확 달아났다. 날도 따뜻한데, 책상 위에 놓인 왼손이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담임인 이재우 선생은 힘내라는 듯 정현의 어깨를 툭 치며 교탁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출석부를 폈다.
“그건 그렇고. 안 온 놈 없지? 있으면 손 들어 봐라.”
여자애들은 늘 하는 시시한 농담에 웃지 않았다. 그저 사내애들 몇몇만이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정현은, 교탁 옆에 웬 여학생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빨리 준비 안 하니까 전학생 소개도 못하고 말야. 반장, 인사.”
반장이 구령을 붙이고, 인사를 했다. 남의 반은 인사부터 하고 시작한다는데, 담임이 맨날 뒷문으로 들어와 버릇 하니 인사 한 번 하기가 쉽지 않은 거다. 이 선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전학생을, 그것도 이 학교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을 미모의 전학생을 돌아보았다.
“반이 어수선해서 말이지.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차고 고요하고 단정한 목소리였다. 마치 빙산에서 녹아내린 맑은 물이 파문 한 점 그리지 않고 고요한, 그런 거울처럼 맑은 호수와 같이.
순간, 정현은 심장이 멎는 듯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실재하지 않는 통증이었다. 그러나 정현은 어쩌면 그 통증 때문에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그녀가 여기 있을까. 길고 검은 생머리를 뒤로 단정히 넘겨 묶은, 날카로운 눈매를 무테 안경으로 살짝 가린 소녀의 얼굴은 낯익었다. 비록 안경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소개하겠다. 그동안 외국에서 지내다가, 이번에 귀국을 하게 되었는데. 이름이……”
천재 바둑 소녀 선우 륜.
“선우 륜입니다.”
못 알아볼 리 없다. 선우 륜, 바로 그 아이였다. 정현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여기 있는 걸까. 아까의 꿈은 대체 어디까지 꿈이었던 것일까. 마른침을 삼키며 정현은 륜을 바라보았다. 륜은 새침하게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 그렇지. 선우 륜. 한국 생활은 아직 서투를 테니까 다들 도와주고. 그러고 보니 우리 반에도 중학교 때 까지 외국서 살다 온 녀석 있지.”
“남정현요.”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아, 쓸 데 없는 소리를. 정현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이 선생은 재미있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거 봐라. 이런 미인이 전학을 오는데 아침부터 자고 있으면 되나. 선우 륜 너, 저기 남정현 옆에 가서 앉아라. 남정현도 외국생활 오래 했으니까, 잘 좀 도와 주고.”
“저기, 선생님.”
“어, 왜.”
“전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왔는데요.”
“미국이나 프랑스나지.”
아니, 물론 선우 륜이 옆에 앉는다는데야 싫다고 할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미국과 프랑스는 서구와 계양구 정도의 차이가 아니란 말이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에는 미국에서도 살았다지만 그거야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고. 그 이후에는 대부분 유럽에서 지냈는데 도움이 되기는 될지 모르겠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다가 외국에서 왔으니 도와주라고 말씀까지 하시는 데야. 기대같은 것 했다가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조금 전에는 가슴이 욱신거리더니 이번에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현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왜, 옆에 앉기 싫어?”
“……아, 아뇨.”
당연히 좋죠.
너무 좋아서 옆에 있다가는 심장마비로 돌연사할 까봐 그러죠. 아니, 설령 그 전학생이 평소부터 동경하던 선우 륜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미인이 옆에 앉는다는데 싫다고 했다가는 틀림없이.
“고자냐, 새꺄.”
이런 소리나 듣고 말겠지. 그리 생각하며 옆에 놓인 책상을 바로 해 주다가, 정현은 왜 바둑기사라고 소개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다. 아버지는 남자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중 하나로 바둑이 있다고, 어릴 때 부터 주말에는 바둑판을 펼쳐놓고 정현에게 바둑을 가르치곤 하셨는데. 여기서는 바둑부도 영 인기가 없고, 또래의 녀석들도 바둑같은 소리를 꺼내면 영감 같다며 퉁을 놓곤 했다.
뭐, 한국에서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바둑을 대충은 둘 수 있게 된다는 말은 들었지만, 생각만큼 바둑에 열성적인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것을 정현은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 따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지도. 륜은 조용히 정현의 옆자리에 다가와 앉았다.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정현의 어깨를 살짝 스쳤다. 신선한 오렌지를 짜개는 듯한, 달큰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건 무슨 일일까. 그녀의 꿈을 꾼 날, 그녀가 이렇게 전학을 온 것은. 한때 이모가 열 올리던 시크릿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바탕화면에 깔아놓고 끝없이 동경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난데없이 꿈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일까. 그 순간.
-푹.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그 꿈이 갑자기 한 덩어리로 뭉치며 마치 딕셔너리 넘어가듯 줄줄이 이어진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머릿속에 들어왔다. 깨진 석고상처럼 굳어 쓰러진 채 산산조각이 나 버린 버스 기사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던 뱀의 혓바닥을 가진 여자와, 그리고 여자의 목을 창으로 꿰뚫어버린 소녀의 모습이 선명한 인상을 남기며 눈앞을 스쳐갔다. 정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일이야?”
“……응?”
아니, 우연이지. 우연일 뿐이다. 꿈은 반대라니까, 이런 미인 전학생과 짝이 되는 행운이 있으려고 그런 악몽을 꾼 모양이다. 정현은 그제서야 혼자만의 세계에서 겨우 빠져나와, 자신을 부른 사람을 돌아보았다. 안경을 벗은 선우 륜이 정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남정현이라고 했지.”
“어, 응……”
“선우 륜이라고 해. 지금 세 번째 말하는 거야.”
아, 그렇지. 그런 개꿈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아니, 버스 사고 때 머리라도 어디 부딪힌 게 아닐까. 이따가 양호실에 가 봐야지. 꿈은 꿈이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갑자기 전학 온 여자애랑 짝이 되었더니, 첫 날부터 갑자기 끌고 나가서 세계의 운명을 논하거나 하는 것은, 윤호 녀석이 보는 판타지 소설 같은 데나 나오는 거다. 그런 뻔한 이야기야 요즘은 초등학생도 안 읽겠다. 암, 그렇고 말고. 음, 그런데 뭐?
“세 번째?”
“계속 말을 시키는데, 대답을 안 하잖아.”
“내가?”
“응.”
어쩐지, 등 뒤의 시선이 따가웠다.
“할 말이 있는데, 잠깐 나가서 이야기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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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 “이도영”씨는 S모 라이트노벨 브랜드의 고명하신 아크님 패러디죠. 
뒷부분에는 한번도 마감에 늦은 적이 없는 “홍성아” 작가도 나옵니다.
I was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