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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다 썼어요!!!!!

January 22nd, 2010

끝났다아아아아아!!!!!!!!!!!!!!!!!!!!!!!!!!!!!!!!!!

자정무렵, 원고를 끝내고 저는 기쁨의 북북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뭐랄까 제대로 완결이 난 로맨스인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때문인데요. 퇴고하고 초벌교정까지 싹 해서 조금 전에 메일 보냈습니다. 아이폰용 앱북으로 나갈 예정이예요. 자세한 이야기는, 일정 받고나서 마저 올릴께요.

운동삼아 108배를 하고 자려고 했는데 108배할 기운이 없……….. 중얼중얼….. 늙었나…………

뭔가 진심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기분입니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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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표지 아이디어

November 17th, 2009

연재중인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이 앱북으로 나갈 예정입니다.

Untitled-2

표지 아이디어로 만들어 보낸 그림입니다. 괜찮은가요? 저는 플라스크는 꼭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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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7)

October 30th, 2009

“아하하, 잘 있었어요?”

벨소리에 문부터 열고 보니, 시커먼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헉.”

“같이 농구 안 뛸래요? 저기 계산공고에 골대 비었던데.”

“농구하자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 나 저기 살아요. 도두리마을. 가깝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아무리 내가 양심도 없는 막장 교사라 해도…… 아니,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연지가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그런 로맨스의 한장면같은 시추에이션을 감히 바라마지않았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안 거예요?”

“에이, 마 선생 인트라넷도 안 보는구나. 그렇죠?”

갑자기 나타난 것은 어쩐지 이 비리비리한 나와는 사뭇 대조되는 저 체육교사. 바로 이정훈 선생이었다.

“근데 나 물 한 잔만 줘요. 하아…… 이거,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더위에 도두리에서 학마을 단지까지 걸어왔더니 돌아가시겠네.”

뭐, 자고로 어마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 믿는 사람이 하는 보시중에 제일 좋은 게 물 보시라고 하셨다. 평생 절집에야 수능보기 전하고 임용고사 보기 직전에만 다녀왔던 나이롱중의 나이롱이지만, 그래도 주워들은 가닥은 있으니 이럴때는 좀 어머님 말씀을 존중하는 센스를 발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들어와요. 문 닫고요, 모기 들어오겠네.”

“아, 쏘리쏘리.”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서, 생수 반에 오렌지 주스 반을 부어서는 얼음까지 둥둥 띄워서 주니 순식간에 싹 비우고 헤 하고 웃는데, 이건 사람에게 물 보시를 하는게 아니라 짐승 먹이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선생은 식탁 의자를 끌어다 앉고 싱글벙글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어요?”

“마 선생 보니까 좋아서요.”

“……위험한 발언 하지 말고요.”

“뭐가 그렇게 위험한데요?”

헉, 말려들 뻔 했다. 나는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아니, 지난번에 좀 위험한 만화도 보시길래.”

“아, 뭐. 그거야 순정 보다가 잘못 밟으면 읽는 거고. 걱정하지 말아요. 난 여자가 좋아요.”

“아, 예.”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물론 이럴 때, 그냥 일하고 있었다거나 콘티 짜고 있었다거나 데생이나 작화중이었다는 소리를 하면 큰일난다.

“그냥 놀았죠, 뭐.”

“만화책도 보고?”

“아, 뭐……”

“어떤 거 보는데요?”

“그냥 뭐…… 누나가 갖다놓은 거……”

“오오!”

이 선생은 눈을 빛냈다.

“나 좀만 보여주면 안돼요?”

“……약은 약사에게, 만화는 만화방에.”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만화는 사서 보는 거죠!”

“그럼 사서 보시……”

“근데, 문제는 내가 순정만화 같은 거 보고 있으면 우리 집에서도 내가 미친 줄 안단 말이에요. 아아, 미치고 팔짝 뛰겠네. 아니, 남자가 체격 좋으면 순정만화도 마음대로 못 봅니까? 이런 부당한 경우가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아참. 그런데 정말, 난 지금까지 순정만화 한 권을 내 마음대로 못 봤어요. 하아…… 그래서 마 선생이, 누님이 만화기자고 하니까……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아서 좋았거든요. 순정도 많이 읽고.”

“좀 그런 편이긴 하죠, 음……”

“그래서 말인데 치키타 구구가 다시 나온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에에? 그거 권당 만원에 샀는데! 다시 나온다고요?”

“에이, 뭐예요 마 선생. 만화기자 동생분이 그런 소식도 못 듣고.”

“어디서 나온대요?”

“조은세상요. 아, 이번에는 8권까지 판권 다 들어와 있대요. 다 낸대요.”

“어, 그거 진짜 다행이네요.”

“그렇죠?”

뭐랄까, 순간 구렁이가 담을 넘은 듯한 미묘한 기분이 들기는 들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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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6)

October 27th, 2009

“어떻게 하기는.”

머리를 싸매고 콘티를 짜며, 나는 최대한 무관심 무신경한 태도로 대꾸했다.

“걔 입장에서야, 선생이 학생이랑 학교 안에서 남녀상열지사를 벌이는 게 참 보기 뭣했겠지.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탓인가 하리라, 무슨 쌍화점도 아니고 걔한테 내가 뭐라고 그래?”

“뭐라고 그러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는 것은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누나는 갑자기 히죽 웃으며 말을 보태었다.

“다만 말이다, 이런 황금같은 시추에이션을 눈 앞에 두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 된 도리는 아닌 것 같아서.”

“응?”

“그걸 어떻게 좀 스토리에 활용해 봐.”

무슨 헛소리야. 하고 생각하는데 누나가 얼른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어때? 윌리엄을 덮치는 우리 주인공을 좋아하는 또다른 남자애를 넣으면.”

“뭐야, 누나.”

“딱 구도 나오잖아. 야, 그 지수라는 애가 연지 라이벌이라며. 그게 정말로 라이벌 의식만 느끼는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백합, 백합 삘 나잖아, 그냥 딱 봐도.”

그러니까, 지금 누나 말은 소위 삼각관계에 대한 것인데.

“……걔가 날 좋아해서 그럴 가능성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러니까 노멀한 것은 생각도 안 하고 바로 백합으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이런, 왕년의 오오테이자 현직 만화 기자로 예나 지금이나 뇌의 부패도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우리 누나다운 생각이긴 한데.

아이고, 누님.

“좋네, 이번 콘티에 그거 넣어봐. 어느 녀석이 숨어서 보고 있고, 다음 번 콘티에는 키스를 엿보고 동영상 찍고. 그래서 윌리엄이 곤란해지는 거 어때? 응?”

“소문 쫙 났어.”

“무슨 소문?”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겨우 조용히 넘어갈까 했는데. 일 안 키우려고 교장실로 부른 거였잖아. 근데 연지 녀석은 나 붙들고 복도에서 끌어안지, 수업 들어가 보니 이미 학교엔 소문이 짜하지. 나 미치겠더라. 그나마 방학 들어갔으니까, 제발 개학할 때 까지 소문이 더 커지지 않았기만 바래야지. 어휴.”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학교 애들이 다 난 줄 알면 어떻게 해?”

“자의식 과잉일세, 마태오 작가.”

누나는 뒤통수를 툭툭 치며 빙긋 웃었다.

“어차피 너 내일부터 방학이잖아. 개학하고 나면 다들 잊어버릴거야. 그나저나 그거, 어디까지 되었어?”

“콘티?”

“말고, 너 지난번에 한다고 한 것 말이야.”

그러니까 그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어쩐지 장미족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그것 말이다. 나는 구석에 놓아 둔, 데생까지 끝난 원고용지가 들어있는 파일을 내밀었다.

동인질은 일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아예 누나의 전폭적지지 하에 동인질을 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콘티 짜고 글 쓰는 재주는 있을지 몰라도 그림 그리는 쪽으로는 상당히 비루한 그 그림으로 냅다 달리기만 하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이제는 세월이 흘러 “어디를 잘라도 짤방감”같은 소리까지 듣게 된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개그물이 될 판이었으니, 중간중간 누나의 체크를 받아가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다 나름 프로로 활동하다 보니 이젠 연출의 완급 조절도 좋아져서, 그 짧은 방학 동안 나는 예전에 쟁여놓은 혜인만화용지 위에 제도잉크로 미친 듯이 컷들을 그리고, 톤을 붙였다. 구름이나 집중선이나 하늘하늘한 레이스나, 그런 것은 포토샵에 적절한 브러시나 패턴이 있으니까 따로 삽질할 필요가 없었다.

“어쩔시구리.”

“왜.”

“그래도 대충 볼만한 걸 만들잖아? 너 그냥 아예 전업만화가 하면 어때?”

“……저기, 이거 말입니다.”

1차로 완성된 원고는, 누나가 대충 확인하고 숙련된 포토샵 솜씨로 인쇄에 적절하게 손을 본 뒤, 돌려주었다. 나는 식자를 붙이고 표지를 그렸다. 코트 차림에 안에 셔츠는 가슴까지 풀어헤친 앙드레에게 애니판의 갈색과 만화판의 쑥색 중 어느 쪽 코트를 입힐까 고민하며 컬러를 입히고, 표지를 그린 김에, 샘플이미지를 만들어 블로그에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짧지만 보람찬 방학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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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5)

October 24th, 2009

연지가 교장실로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간단하게 말해서 삽질, 좀 폼나게 말하자면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중에 뭐 틀린 것이야 없었지. 문자 그대로 ‘사실의 적시’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래도, 그렇게 말을 하면 안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실망하겠지. 경멸하겠지. 남자가 되어서는. 그래도,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잃을 게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달랐다. 학생인 연지가 내게 키스를 했다고 하면, 주의나 근신 정도는 받을 수도 있겠지만 고3인데다 전교 톱인 애한테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테지만. 교사인 내가 학생에게 키스를 했다고 하면, 징계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잃을 게 많다는 이야기다.

남자니까, 하고 덜컥 책임을 대신 져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도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 일에 대해서. 하지만 연지는, 뭐라고 할까.

“사생활이라는 게 없네요, 사생활이.”

교장실 와서는, 교장 선생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너와 마동진 선생이 학내에서 서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는데 사실이냐고 묻자마자 나온 대답이 저거였다. 이 녀석.

“그래서 지금 선생님도 여기 붙잡혀 와 계신 거예요? 하아. 저기, 저 마 선생님 좋아하거든요. 물론 학교 안에서 그런 것은 좀 문제인데다가.”

“학교 안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런데다가 억지로 제가 키스해버린 것은 좀 문제긴 하지만……”

연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학내 면학 분위기를 해쳤다면 죄송해요, 앞으로는 학교 밖에서 할께요.”

“자, 잠깐. 이연지 학생.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건가?”

“그럼요.”

연지는 폰카로 촬영한 동영상까지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이런 거나 찍어서 고자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선생님들 보시기에 좋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는 주의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연지 학생.”

당연한 수순으로, 학생주임 선생님이 낯을 잔뜩 찌푸리셨다.

“지금 전교 1등 한다고 안심하고 그러는 모양인데, 이거 징계 감인 것 알아, 몰라?”

“징계 감이요?”

연지는 싱긋 웃었다.

“제가, 키스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눈에 티가 들어가셨길래 그거 불어드렸다고 말씀드렸으면 뭐라고 하셨을 거예요? 그러면 그 동영상 갖다드린 애도 불러서 확인하실 건가요?”

그러니까 사실은 나도, 저녀석이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정 문제가 된다면 징계 받죠, 뭐. 어차피 학교장 추천 같은 건, 저 말고 치맛바람 잘 날리는 집 애한테 주실 거잖아요?”

“아니, 이 녀석이.”

“네가 너 혼자 잘나서 지금 그 성과가 나오는 줄 알아?”

“솔직히 수업, 선생님들도 학원에서 다 배우고 왔으니 넘어가자 넘어가자 하셨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아닌데.

“징계 주시고 싶으시면 받죠, 뭐 그런데 학교 밖에서 그러는 것은 신경도 안 쓰시잖아요. 학교 밖에서 애들 뭐 하시는지 신경도 안 쓰시잖아요.”

이 녀석.

“솔직히 말해서 전 마 선생님 좋아해요.”

지금 누구 잡으려고……

“보란 듯이 서울대 짠 합격해서, 그러고는 선생님한테 고백할 거예요. 선생님들도 제가, 서울대 합격 플래카드 하나 걸어드리면 뭐, 딱히 문제일으킨 것도 없는데 이런 문제로 그러실 필요 없는 거잖아요?”

작정을 한 거냐!

그나마 교사도 공무원의 일종이고, 자기가 실수한 일이 아닌 이상 문책을 당하거나 할 일은 없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나로서는 가장 좋은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긴 했지만.

아니, 내 문제는 그렇다고 치고 너, 너 아직 학생인데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이었드냐!

“어차피 저한테 기대하시는 건 그게 다인 거 저도 알고 선생님들도 아는 이야기잖아요?”

“너 무슨 불사조냐.”

결 국 어안이벙벙해 있는 교장 선생님과, 불같이 화를 내는 학생주임 선생님과, 뒤늦게 불려들어와 무슨일인지 상황 파악 하느라 정신없는 우리 반 담임, 최윤형 선생님을 남겨두고, 나는 거의 도망치다시피 연지의 손을 붙들어 끌고 나왔다. 이건 뭐 거의 잡히면 죽었다 수준도 아니고.

“선생님들한테 그러면 어떻게 해.”

“틀린 말은 아니었잖아요?”

아 니, 지금 저가 얼마나 황당하고 위험한 짓을 하고 온 건지, 이 녀석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황당하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그냥 자기 잘났다고 치기어린 잘난 척을 하는 것이라면, 딱 그만큼 꾸짖고 말면 될 문제다. 하지만 연지가 하는 짓은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연지는 깔깔거리고 소리내어 웃어대었다.

“졸업하기 전에 말이에요, 한번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다 사실이잖아요?”

“얌마.”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머리는 그렇게 좋은 녀석이 왜 자꾸.

“물론 추천입학이나 그런 것은 몰라도, 내신도 있고. 조금은 더 참아도 되잖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입시 끝나고서 해도 되고……”

“선생님이 좋아요, 전.”

“……”

“만화 스토리작가 마태오도 좋아하고, 지금 여기 화학선생님인 마동진 선생님도 좋아해요. 키스 말이에요, 제가 장난으로 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이슈 안 보셨어요? 첫키스를 실수로 하는 여자애가 어디 있어요. 실수도 장난도 아니에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무엇이 되었건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을 열면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이 녀석은 복도에 지나다니는 애들이 뻔히 바라보는 가운데 내 목에 팔을 감고는 꼭 끌어안았다. 나는 나보다 한참은 어린 제자 녀석에게 끌어안긴 채, 무의미하건 어떻건 간에 저항을 하고 있다는 증거인 듯 팔을 파닥거렸다. 이러다가 나는, 발령받은 첫 해로 제자를 공략한 희대의 껄떡교사로 교육청 역사에 찬란하게 남고 말 노릇이었다. 그때, 연지가 내 귀에 속삭였다.

“이과의 김지수가 한 짓인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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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4)

October 13th, 2009

“마 선생.”

그날 오후, 쓰고 달고 하여간 맛도 별로 없는 커피를 앞에 놓고, 교장 선생님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싶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계셨다. 처음 발령받은 날에 잠시 들어와 인사는 했지만, 교장실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학생주임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까지 옆에 앉아계시는 이런 살벌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는데.

“마 선생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교사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킬 만 한 일이라는 것, 알아요, 몰라요?”

“예?”

작은 잿빛 뇌세포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만화 스토리작가 마태오라는 사실을 알아낸건가? 잠깐, 그래도 롤러코스터는 아직 뭐 벗기고 뒹굴고 하고 그런 건 없었는데? 다소 교권침해적인 내용이 있지만 만화는 판타지이므로 가능하다고 말할까? 아냐, 지금 만화 때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데 먼저 그렇게 나설 이유는 없어. 마동진, 침착하자. 릴랙스, 릴랙스. 알아보니까 뭐, 저술활동은 공무원 겸직의무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럼 교사도 그럴 거 아냐. 생각해 보면 교사들이 문제집 같은 거 좀 많이 써? 나 학교 다닐 때 지학사 하이라이트 문제집 보니 필진중에 우리 학교 선생님도 있었는데. 아, 썅. 그래서 맨날 그것만 갖고 풀었지. 마르고 닳도록. 그거 인세 받는 것이었겠지? 얼마나 받았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교사로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흠, 흠!”

설마, 내가 그린 동인지라도 본 건가? 롤러코스터의 스토리 작가라면 모를까, 미소년과 미소년의 뼈와 살이 타는 그 뜨거운 야오이 동인지를 들켰다가는 꾸지람 듣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 작살이다. 살면서 이런 위기상황에 처한 것은 살다살다 처음이었다. 블로그 폐쇄하고 어디 안 보이는 곳으로 숨어들어가든지 해야지.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교장 선생님, 저는……”

“아니, 어떻게 제자하고 그럴 수가 있나. 응?”

“예?”

“대학 졸업한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상황파악이 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즘 성희롱 때문에 쉬쉬하는 줄 몰라서 지금……”

잠깐, 그러니까 만화가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자, 잠시만요. 제게 설명 좀 해 주세요.”

“자네 정말 양심도 없구만. 이걸 보고서도 그렇게 뻔뻔스럽게!”

교장 선생님은 컴퓨터를 켜고, 불쌍할 정도로 용을 쓰셨다.

“이, 이거 보게. 이게 뭐냔 말이야!”

대충,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절로 상상이 가는 사진 한 장이 모니터에 떠 있었다.

“교사가 학생하고 학교 안에서…… 아니, 학교 밖에서도 그러면 안 되지만, 이게 뭔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뭔가 대단히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이 그랬지만, 사실이 그렇잖은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 이야기다, 이건. 물론, 정황상 남교사와 여학생이 입술을 서로 대고 있는 상황을 누군가 보았다면 남교사가 여학생에게 그리 했으리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지대히 높기는 했는데.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하라고.

“그럼 이건 뭔가.”

“……”

“이건 뭐냔 말이야!”

“……당했습니다.”

인간 마동진, 넌 남자도 아니야. 라는 자조어린 문장이 머릿속에 휙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존도 벅찬 88만원세대라는데, 지금 여길 그만두면 다시 교사만한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고. 그나마 밥벌이 되는 직장을 구했으니까, 앞으로도 만화 보고 동인질 하며 살 수 있는 것일 텐데. 아니, 무엇보다도 나는 매달 17일에 지급되는 그, 크고 아름다운 월급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포기하고 여길 순순히 나갈 수 있겠어. 그러니까 말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여자가 남자를 희롱한 것에 대해서는 법으로 뭐 따질 것도 별로 없는데다가, 남부끄러워서 어디다 말도 못 하는 그런 거니까 어떻게 괜찮을 거다. 그런데다 전교 톱인 여자애를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좀 미안하지만, 남자답지 못하긴 했지만, 나도 좀 살자, 연지야.

“……얘한테 당했다고요, 제가!”

물론, 대충 상상하셨던 상황의 정 반대 상황은 꿈에도 생각 못 하셨을 분들의 반응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라서.

“그럴 리가.”

“사실인데도 말이 안 나오는데, 설마 이런 걸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도 사나이 대장부란 말입니다. 가르치는 제자한테, 그것도 요만한 여자애한테 눈 가려지고 키스 당했다고 말하는 게 저는 안 부끄러울 것 같으세요? 여자들은 성희롱 당했다고 울먹울먹 하면 다들 토닥토닥 해주기라도 하죠. 남자라서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는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이연지 학생이.”

“그렇습니다, 교장 선생님!”

“그러면 그, 반지는 또 뭔가.”

대체 어디까지 이야기가 들어간 거야. 나는 이를 악물며 받아쳤다.

“대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까?”

“누가 했는지 그게 중요한가? 마 선생, 이건 중요한 문제야.”

“반지를 준 것은 사실입니다.”

대충, 누가 일러바쳤는지 짐작이 가긴 했다. 그 녀석일까. 그 이과 수석이라는 녀석. 김지수.

“학생주임 선생님께서는 아실지도 모르지만, 연지는 그…… 만화 행사 같은 데 종종 참석을 했습니다. 코스프레라고요.”

“꽃을 뭐?”

“코.스.프.레.입니다, 교장 선생님. 만화 주인공으로 분장하거나 하는 활동입니다만, 지금은 중요한 고 3 시기이고 연지는 정말 뛰어난 학생이라서, 담임 선생님께서 연지가 수능 볼 때 까지 그런 데 가지 못하도록 말려 달라고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젊고 만화에 관심도 있으니까 이야기가 통할 것이라고요.”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친구들은 다들 수능 백일 반지를 사줄 남친이 있거나 계를 하거나 했는데, 자기는 그럴 사람이 없으니 부적삼아 백일 반지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안 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딱히 만화 행사에 안 갈 이유가 없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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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3)

October 11th, 2009

“무슨 일이신데요?”

수능 D-100일이라는 역사적인 날의 아침이 밝았는데도 고3 노는 것은 귀신도 며느리도 모른다.

나는, 분명히 나도 몇년 전 경험했을 그 한심한 풍경, 예를 들면 백일주를 마시자는 둥, 백일 노래방을 가자는 둥, 누구는 남친에게 18k 백일반지를 받았네 어떻네 하는 웃기는 풍경들을 남의 일 구경하듯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그 녀석을 불렀다. 아니, 뭐 딱히 반지라든가 그런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수, 수능까지 100일 남았잖아.”

“예.”

“……그러니까 그 날까지 만화 보지 말고, 코스프레 하지 말고.”

“선생님 신간 회지도 사지 말고요.”

무, 무슨 소리야.

“블로그에 어제 올리셨던데요.”

“넌 남의 블로그를 맨날 봐서!!!!”

“RSS 구독하고 있다고요.”

“……시끄러, 이번에 그리는 거 19금이야.”

“고3은 열 아홉 살 맞아요.”

“만으로 19금이야!”

“아아.”

그리고 연지는, 그 19금이라는 말을 듣고는 기분좋은 듯 미소지었다.

“현역 고교 남교사가 19금 동인지를 그리고 있다는 말을 그렇게 크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요. 누가 듣겠어요.”

“으윽……”

“그런데다 그 19금이, 야망가도 아니고 야오이라면……”

“그, 그만.”

“근데, 그 말씀하시려고 부르신 거예요?”

물론 그럴 리가.

나는 반지 상자를 꺼내어서, 연지의 코 앞에 불쑥 내밀었다.

“사이즈 같은 것 모르니까 알아서 해.”

나름대로는 터프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연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도 안 어울려요.”

“……어쩌라는 거야, 그럼.”

“아뇨.”

연지는 상자를 열어보며 생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남자한테 반지 받는 것은 처음이니까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아아, 뭐. 백일반지를 갖고.

뭔가 한 번씩 주고 받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뭐. 우연인지, 아니면 반지가게 직원인지 사장인지 모를 그 여자의 센스가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반지는 연지의 약지에 꼭 재어 맞춘 듯이 맞았다.

“왜 하필 거기다 껴?”

“선생님 건 없어요?”

“커플링이냐, 나까지 끼게.”

“좋은 글이 새겨져 있는데요?”

“아, 그거?”

“무슨 뜻인지 아세요?”

“아니.”

“훗.”

에고 아마비, 아모, 아마보 투암.

원래 라틴어를 읽는 것이 그런 식인지, 연지는 적혀있는대로 소리내어 읽었다. 무슨 뜻 같아요. 연지가 미소지으며 물어보았다.

“내가 어떻게 알아. 난 화학 선생이란 말이야.”

“알고 있어요.”

연지는 생긋 웃더니 반지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내가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내 뺨에 입맞추었다.

“하, 학교에서 무슨 짓이야!”

“그거 아세요, 마태오 선생님?”

연지는 당황해서 시뻘개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교사가 되어서, 철없는 어린 학생이 이러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두는 것도 어쩌면 직무유기일 지 모르지만.

사실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실은 이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눈을 감았다. 연지의 따뜻한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나는 돌부처처럼 굳어 있었다. 온 몸이 굳은 채, 그저 연지와 닿아 있는 부분만이 제대로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장면을 누군가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으악! 뭐 하는 거야! 넣지 마!”
“키스를 입술로만 하나요?”
“대체 어디서 뭘 배운 거야!”
“선생님 만화에서요”
“으, 으악!!!!!!”
“저런, 처음이셨군요. 맨날 그리시면서…… 설왕설래는 사실 처음이었다…… 라니.”
“아냐!”
“아닌데 그렇게 당황하세요? 닿기만 했는데?”
“아니라니까!!!!!!!”
“어쨌건 다음 화 롤러코스터부터는 이제 리얼함이 가미되는 건가요? 좋아라~.”
“아냐아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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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2)

September 29th, 2009

그래서 졸지에 귀축 변태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런데다가 앙드레가 거기서 만나는 또다른 금발미남이 아예 테르미도르에 나온 그 줄르라고 만들어버리니 대략 몇 개의 만화가 짬뽕이 되는 것이냐 싶다가도. 여튼 콘티까지 끝내놓고, 나는 홍대로 향했다. 만화책을 사는 것이 주 목적이고 반지는 부, 라고 생각했지만, 어쨌건 그녀석이 그렇게 원한다는데 반지 정도야 뭐. 정말로 사귀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반지 하난데. 나는 북새통에서 치키타 구구며 바쿠만이며 이것저것 골라 구입하고는 책을 손에 들고 비탈길로 죽 올라갔다. 거기서 또 신촌 쪽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철길 그 건널목까지 와 버렸다. 여기가 아닌가벼. 하고 이번에는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가게 입구를 하나하나 살피며 천천히 되돌아오는데, 갈색 벽돌 건물 1층에 누나가 말한 가게가 있었다. 젠장, 간판이 작기도 하지.

“반지 좀 보여주세요.”

직원인지 사장인지, 말수가 없는 여자가 반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글자 몇 개 새겨진 것 말고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약간 폭이 있고 아주 무덤덤해 보이는 반지 하나를 골랐다. 자, 그런데 여기서 반지 처음 골라 보는 남자의 결정적인 문제가 드러났으니.

“끼실 분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죠?”

“……”

왓더헬이다, 이거.

“사, 사이즈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24년 조금 넘게 살아오면서 한번도 생각 못 한 시추에이션이긴 한데, 목걸이나 귀걸이나 팔찌라면 몰라도 반지는 사람마다 치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여기 와서 이러고 있는 거다. 세상에.

“아…… 그게……”

“모르세요?”

“예……”

나는 순순히 시인했다.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 보다는 그게 나았다. 그리고 뭐.

“그, 근데 괜찮을 거예요. 어차피 학생이라 반지를 끼고 다닐 상황은 아니고, 끈 꿰어서 목에 걸고 다니면 된다고 했으니까.”

“아아.”

“그런데다가 수능 백일 반지라서…… 재거나 물어보고 하기도 좀 그렇거든요. 시간도 없고.”

“키가 어느정도 되죠?”

“음, 한 이 정도…… 실내화 신고 이 정도니까……”

“날씬해요?”

“아, 예. 좀 말랐어요.”

“그러면, 이 정도는 어떨까요?”

직원인지 사장인지 하는 그 여자는 한참 생각을 하더니 적당한 크기의 반지를 골라주었다.

“아, 그렇게도 알 수 있어요?”

“특별히 손만 두껍거나 하지 않으면, 어느정도 비슷한건 있거든요. 한두 치수 정도는 수선도 가능하니까, 그리고 이니셜 새긴 것 아니니까 안 맞으면 교환해도 되거든요.”

“아, 그럼 그걸로 주세요.”

“선물용이니까 포장할께요.”

“예.”

상자에 들어가기 직전에, 나는 여자의 손에서 광택천으로 한번 더 마무리되는 그 반지의 반짝임 속에서 선명하게 새겨진 글귀를 읽을 수 있었다. ego amavi, amo, amabo tuam! 모르긴 몰라도, 그냥 보기에도 좀 라틴어 스러웠다. 예전에는 영어나 프랑스어면 충분했다는데, 요즘은 만화니 소설이니 심지어는 이런 액세서리에까지도 라틴어가 간지인 모양이네. 이러다가 더 세월이 흐르면 동인질 할 때 폼잡으려고 산스크리트 어 까지 배워야 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1500번 버스를 타고 돌아와, 나는 계산삼거리에서 내렸다. 뭐, 반지야 아무데서나 사도 되긴 하지만, 아무데서나 파는 은반지는 조금 싼티가 났고, 금은 환장하게 비쌌다. 누나는 조금만 양감이 있어도 확 고급스러워보이는 거라고 그랬는데, 이왕이면 좀 예쁘다 싶은 것을 사주고 싶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여자애니까.

걸리버 여행기에 보면 릴리퍼트 왕국에서 걸리버의 엄지손가락 둘레를 재어 옷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정도는 비례라는게 있다는 말이겠죠. :-) 뭐, 어차피 크건 작건 연지에게야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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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1)

September 25th, 2009

-선생님만 생각하면, 봐요. 이렇게 미열이 올라요.

어쩌면 나는, 예술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한 신경줄을 지닌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당신 손만 닿아도 이렇다니까. 이리 와요. 싫다고요? 정말로?

……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원하고 있으면서 말이죠?

그 증거로, 그런 일을 당해놓고도 이런 콘티를 짜고 있는 거다. 남고생이 금발의 원어민 강사(역시 남자)를 유혹하고 덮치고 유혹하고 덮치고 대체 수능 준비는 언제 할래 싶은 그런 어디 야오이에나 나올 것 같은 상황…… 이 아니라 사실 씬만 절제했지 야오이나 다름없는 시추에이션이긴 하지, 뭐. 하여간.

으아아……

“음, 좋은데. 그렇지. 남자들하고 달리 우리 잡지 독자는 소녀들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런걸 우리 학교 학생같은 얼라들한테 읽히고 있다는 것 부터가 범죄란 말입니다, 나는 내 콘티를 꼼꼼히 점검하는 누나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반항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뭐 그랬다. 이젠 대략 기운이 빠졌다고 해야 하나.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학교 선생 노릇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이거, 애태우듯이 유혹하는 게 아주 좋아. 남자들 잡지 같으면 일단 벗기고 덮치는 쪽이 확, 시각적으로 자극이 되니 좋은데, 여자들도 시각적 자극에 예민하긴 하지만 일단은 대사빨이 중요하다고 했잖아. 슬슬 안을 달구듯이 말이야. 이번 화 처럼만 계속 해주면.”

“어어.”

“그리고 뭐야. 요즘은 동인질 안 해?”

안 할리가 없지. 짬짬이 메모는 하고 있는걸.

“동인질까지 신경쓰냐, 누나도 참.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다구.”

“언제부터 프라이버시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런 놈이 낸 책을 모조리 다 갖고 있다니, 난 대체 얼마나 능력좋은 편집자인 거야.”

누나는 사악하게 웃었다. 하긴 뭐, 어차피 마태오라는 이름으로 내게 되면 누나가 체크 못할 리가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바닥에서 누나 몰래 뭔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바닥에 내려와 앉았다.

“사실은 그러니까, 연습장 만화 같은 것 정도는 해놓았는데.”

“으흠.”

“예전처럼 그림까지 그릴 시간이 별로 없어서. 방학때 쉴 수 있었으면 서플에 내려고 했는데 말야.”

“다음 목요일부터 쉰다며. 그때 하면 되지.”

“콘티 일 안 하고?”

“세이브 해 놓은 거 있으니까, 콘티만 괜찮으면 한주 휴가 줄 수도 있으니까 말야. 어떤 건데?”

“어, 그러니까.”

나는 일때문에 짜는 콘티 말고 그냥 심심해서 짜놓은 콘티를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그건 어떤 내용이었는고 하니.

“베르사이유의 장미?”

“응.”

“오오, 이건 ‘그날 밤’이잖아! 혁명 전야!”

시작은 많이 보고 많이 알던 그 내용에서 시작하는 거다. 그러니까, 파리로의 출동 전날, 어차피 결핵에 걸려 남은 목숨은 길지 않은데다, 살더라도 민중의 편에 설 결심을 굳힌 오스칼이, 앙드레를 자신의 방으로 부르는 그 장면 말이다. 물론 이건 패러디이니 만큼, 그 뒤에서 아버지 자르제 장군이 “얌마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메이드를 유혹한 일도 없는데 어떻게 너는 그렇게 대놓고 우리 집 하인을!” 하고 냅킨을 입에 물고 부르르 떠는 개그컷 같은게 들어가 있을 만도 하고.

그리고 그녀 방문 앞에 선 앙드레. 방 안에서는 오스칼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음?”

누나는 연습장을 들여다보다 눈을 부라렸다.

“앙드레가 왜 이런 데 가는 거야!”

갑자기 회상으로 들어가 앙드레 그랑디에, 18세.

“원작인 이케다 리요코 여사가 직접 그랬다는걸? 앙드레는 18세쯤에 팔레 로얄에서 창부와 첫경험을 했을 거라고.”

“나의 앙드레는 그렇지 않거든?!”

“대체 누나는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꿈과 환상이야? 남자는 테크닉이라구. 대체, 내일이면 폭동이 일어난 파리로 떠나야 하는데, 그것도 민중과 함께 할 거니까 다시는 자르제 가로 돌아오지 못할 텐데, 그런 오스칼이 앙드레와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밤이 입구도 못 찾아서 쩔쩔 매는 그런 밤이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서른 다섯이나 되었어도 안해본 놈은…… 아니, 용불용설 있잖아, 용불용설! 안쓰면 못하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네가 고삐리냐? 어디 남고생이 야동 보면서 늘어놓으면 딱 좋을 변명이나 늘어놓고. 대체 용불용설을 그런 데다 핑계로 갖다붙이려고 과학교사가 된 거냐!”

뭐, 소녀시절 온갖 화려한 귀축 야오이를 그렸던 주제에 나름 연애도 변변히 못 해보고 아직은 소녀같다고 주장하고 있는 저 희한한 누님의 절규는 잠시 덮어두고.

그래서 팔레 로얄 뒷골목의 유곽을 돌아다니던 앙드레는.

“키 크고 금발에 푸른 눈인 여자만 찾더라 이거지.”

“응, 덧붙여서 곱슬머리.”

“취향이 나쁘네.”

“그런데다가 한번 가보고 괜찮았다 싶으니까, 다음 번에는 남자옷을 가져다 입어주면 안되겠느냐고 그러는 거야.”

“……앙드레 이새퀴.”

“지, 진정해 누나”

“아니, 나쁜 놈은 너잖아, 이거!”

결국 변태 취급을 당하고 유곽에서도 쫓겨난 앙드레, 그의 앞에, 한 은발머리 청년이 나타난다.

-나는 제라르라고 하네. 자네는?

“서, 설마 이거?”

“제라르와 자크의 그 제라르.”

“얌마.”

“왜 그래. 요시나가 후미도 베르사이유의 장미 패러디를 그렸다잖아. 아, 정말 꼭 한번 보고 싶어. 대체 앤티크 동인지에 슬램덩크 동인지도 들여오면서 왜 그건 못 들여오는 거야?”

그렇게 되어서 제라르에게 이끌려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앙드레. 그렇지 뭐, 다들 그렇게 홈오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고로.

“얌마…… 마동진.”

누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연습장을 휘리릭 말아, 내 앞이마를 딱 소리가 나게 후려갈겼다.

“그러니까 35년동안 기다리게 해 놓았더니 앙드레는 그 사이에 게이가 되는 바람에, 오스칼은…… 나의 오스칼님은……!”

“기, 기다려. 어쨌건 35년간 동정마법사보다는 잘 할 거 아냐!!!!!”

“잘 하긴 뭘 잘해! 이 변태 귀축같으니!”

“누나아! 내가 남자랑 남자 커플링할 때는 암말 안 했으면서 뭐야!”

“됐어, 휴가는 무슨 휴가야! 방학이니까 콘티 세이브나 해!”

르네상스 같은 것도 보고 자란 마영진 기자는 저보다 약간 연상이겠죠?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대원에서 첫 정발판이 나왔던 것이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 것입니다. 그 전에도 해적판은 있었죠. 하여간, 뭐랄까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는 느낌이 드는 만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1991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댕기”가 나왔죠. 바람의 나라, 불의 검. 그런 만화들을 보며 10대를 보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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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0)

September 23rd, 2009

“어이, 마 작가.”

“……”

“마태오씨, 지금 뭐 하시나.”

그러니까 나는, 백지 연습장을 앞에 두고 장장 30분째, 멍하니 면벽만 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그냥 곱게 두면 우리 누나가 아니긴 했지만, 아무래도 내 상태가 심각해 보였는지.

“얌마, 마동진.”

그냥 흔들어만 볼 뿐, 바로 폭력이나 협박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나는, 멍한 눈을 들어 누나를 돌아보았다. 어째 누나가, 무슨 젤리에 감싸여 둥둥 떠다니는 듯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향정신성 의약품이라고는 반경 10미터 안에 들여놓지도 않았는데.

“누나.”

“왜.”

“그거 누나 반지.”

멍하니 멀게 보이는 누나에게서, 손에 낀 반지만이 도드라져 보였다.

“어디서 샀어?”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물론 여기서 곱게 물러난다면 우리 누나가 아니지. 만약에 그랬다면 지금 눈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나가 아니라, 어디 안드로메다 외계인이 누나를 잡아먹고 둔갑을 하고 앉아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현명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뭐야, 반지라니. 어떻게 된 거야?”

그 괴악한 질문을 듣자마자, 우리 누나의 작은 잿빛 뇌세포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설마 그, 너희 반 여자애 갖다주려는 거야?”

“……”

“난리났네, 난리났어.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정신 차려, 넌 선생이고 걘 학생이야.”

뒤통수를 치는 손은 여전히 매웠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픈데도, 정신은 여전히 멍했다.

“마태오 작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야? 콘티 짜야지. 정신 차려.”

“세이브 해놓은 거 있잖아.”

“야, 글은 습관이야. 하루 안 쓰면 그만큼 감 떨어지는 거 몰라서 이래? 앉아, 일어나. 일어나서 좀 써라. 야!”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고백이라도 받았어?”

“……어.”

“뭐래?”

“자기 말만 들으면 셔터맨 만들어 주겠대.”

누나는 듣고도 기가 막혔는지 눈을 깜빡였다.

“셔터맨이라고?”

“그렇다니까.”

“걔는 뭘 하고?”

“걔, 원래 이과에서 탑으로 놀았는데 문과 가서도 전국구래. 젠장. 자기 말로는 서울대 경제학과 가겠다고 그러고 있더라. 법대가 아니라.”

“그래서 사업 한다고?”

“몰라, 하여간 자기는 투자하고 그럴 건데 적더라도 꼬박꼬박 월급 받는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니 나한테 자기 말듣고 40세에 은퇴해서 셔터맨으로 살아보라고 그러더라. 그게 다야.”

생각해보니 한심한 이야기였다. 아니, 물론 내 꿈이긴 하지, 셔터맨. 하지만 그게 스물 네 살 먹은 건장한 청년에게 제시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돈을 이만큼 벌어주겠다거나, 뭘 어떻게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무슨 사업을 차려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필 집에서 놀고먹는 셔터맨을 미끼로 나를 공략하려 들다니. 낚일 뻔 한 것도 사실은 사실이지만, 생각할수록 어쩐지 괘씸했다.

그런데.

“그거 네 꿈이잖아?”

어째 누나는 빙글빙글 느물느물,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더라 이거다.

“왜, 좋잖아. 셔터맨. 요즘 세상에 누가 아침밥 살뜰히 차려먹어. 늦잠 자는 거야, 늦잠. 아침에 아내가 출근을 하면, 너는 애들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커피 한 잔 내려서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그것도, 무슨 동서 커피 문학상 홍보멘트로 쓰면 딱 맞을 시추에이션을 멋대로 설정하더니 신이 나서 읊어대는 것이, 어지간히 재미있긴 재미있는 모양이지. 나는 혀를 찼다.

“동생이 곤경에 처했는데 그렇게 즐거워?”

“어, 그럼. 근데 반지는 뭐야.”

“수능 백일반지 해달라는데.”

“해달란다고 알아보는 거 봐라. 너도 마음 없으면 그렇게 되냐.”

“됐고, 그거 어디서 했어? 얼마래?”

“홍대 앞에 있어. 매드라고…… 금은 아니고.”

“근데 누나는 이거 반지 뭐야? 남친도 없으면서.”

“그냥 지나가다가 마음에 들어서 하나 사 꼈어. 왜.”

“이런 거 끼고 다니니까 남자가 더 안 꼬이지. 커플링같잖아, 딱 봐도.”

“시끄럽구나.”

물론 교사가 되어서, 학생이 해달라고 보챈다고 다 해주는 것은 절대절대 안 좋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안 해주려고 생각하면 할 수록 자꾸 떠오르는 거다. 입술에 닿던, 그 살짝 열이 오른 듯한 뜨거운 부드러움이. 그 생각만 하면 공연히 낯이 벌개지고 숨이 막혀서.

“……또 왜 그래?”

“아, 아니.”

진짜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선생이고, 그녀석은 학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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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9)

September 21st, 2009

“중학교 때 차이나 펀드에 넣어봤어요. 근데 그때 절정 찍고 수수수 떨어져서 지금은 캐망했고요. 근데 작년에, 바닥 덕덕 긁었잖아요, 지수며 뭐며. 그때까지 세뱃돈이며 뭐며,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랑 저축한거랑 해서 펀드에 좀 넣고, 시험성적을 인질삼아서 몇번 뜯고, 책값 삥쳐서 넣고 세뱃돈 넣고. 아, 친척들이 좀 있어서 세뱃돈 모아놓은게 좀 되거든요. 그래서 하여간 넣었어요. 고3이라고 친척들이 용돈 주면 감사히 받아다가 넣고.”

“그래서?”

“그래서는요, 그래서 지금 1600까지 올라왔잖아요, 코스피 지수가. 인덱스 펀드 종류에 넣어놓으니까, 지수대로 가요. 지금 잘 뛰었어요. 음, 저 첫학기 등록금은 할 만큼 되었는데, 1700 찍으면 환매를 할까 어쩔까 보는 거예요. 하아, 9월 10월 들어가면 그땐 조정 있어도 환매며 뭐며 하기 힘든데. 할 수 없지. 어떤 펀드건 3년 묵히면 손해보는 것은 없다잖아요. 그 말아먹은 차이나 펀드도 대충 다 수복했고.”

뭔가 이거, 최근에 본 누구 소설에서는 도깨비도 펀드에 돈을 붓더만. 이젠 여고생도 펀드질이냐. 대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는 뭐하다가 아직도 펀드 하나 안 든 거야. 삽질이 절로 일어나는 시추에이션이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전 노는 게 좋아요. 코스프레 하는 게 좋고, 책 사서 보는 거 좋아하고. 맛있는 거 먹는 것도 좋아해요. 근데 그러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돈만 필요한게 아니라 시간도 필요한데, 아시다시피…… 가 아니라 우리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오빠네 선배들이 그러는데, 자고로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남아돌면 돈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요. 뭐, 전 그 말에는 찬성 안 해요. 쌤, 오마하의 현자 워렌 버핏이, 연간 수익률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그, 글쎄….. 한……”

“20%래요.”

“……그것밖에 안돼?”

“쌤은 이과 나오셨으면서 무슨 대답이 그래요?”

연지는 혀를 끌끌 찼다. 혀 차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주식투자나 그런 건 복리잖아요. 1000만원이 있다고요. 이거 원금을 두고 연 20%씩 복리로 두면요, 30년 있으면 이게 23억 7천만원이 된단 말이에요. 근데요 쌤, 한번 천만원 넣어 놓고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 기다리듯이 앉아서 손가락만 빨 것 아니잖아요.”

“그, 그렇지?”

“매년 천만원씩 계속 넣으면요. 이거 연리 20% 정기적금에 매년 천만원 넣는 거잖아요. 대충 계산해도, 적금 복리계산식 쓰면 237에다가 1.2 곱하고 0.2로 나누니까, 140억쯤 나오죠. 근데요 쌤, 매년 천만원이면 한달에 얼마인지 아세요?”

“그, 글쎄?”

“83만 4천원. 85만원씩 넣으면 남아서 연말에 닌텐도 한대씩 사셔도 돼요. 쌤 한달에 얼마 저축하시는데요?”

“……저기 나 지난번이 첫 월급인데.”

“그러면 이번달부터 저축을 하세요. 이왕이면 CMA로. 아, 월급의 반을 저축한다고 생각하시면 얼마 나올까요? 우리 외삼촌이 그러는데, 저축은 신입사원때 빡세게 해야 하는 거랬거든요.”

CMA라. 들어본 적은 있는 것이니까 누나한테 물어보고 가입해야겠군.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복잡했다. 대체 이녀석 뭐야. 그런 내 생각은 아랑곳않고, 연지는 아주 제 흥에 겨워서, 계속 신이 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 그래서 제 장래희망은요, 놀고먹는 거예요. 잘 놀고 먹기 위해 돈이 필요하니까 일단은 일하고. 공부해서 투자하고. 그러려면, 제 인생은 아무래도 돈문제에 있어서는 모험과 신비가 가득할 테니까.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저라고 그래도 처음부터 빵빵 터질 수는 없잖아요. 실패도 하겠죠. 그러니까 자산이 어느정도 불어날 때 까지는, 적더라도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남자와 결혼하면 좋을 것 같아요. 교사도 괜찮은데 쌤은 어떠세요?”

“으…… 뭐?”

“제 말 믿고 따라주시면 딱, 40세 되는 해에 은퇴해서 행복한 셔터맨 인생을 즐기게 해 드릴께요. 싫으세요?”

어라라라라라?

그러니까 말이다.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내 꿈은 약사나 교사와 결혼해서 셔터맨이 되는 것이었다. 맞벌이를 하는게 아니라, 셔터맨. 그래서 낮에는 가사를 돌보고 동인질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거다. 돈 잘 버는 잘난 싸모님을 만나서 말이다. 그런데.

“……저기 그거 지금 너.”

“맞아요.”

정신이 반쯤 나간 나를 앞에 두고, 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한테 고백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저 좋아하는 거 깨닫는 거 기다리다가는 호호할머니가 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아, 전 아직 수험생이고 게다가 미성년자니까, 수능 끝나고 대답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하여간, 백일반지 해주시는 거죠?”

죄송합니다, 하느님, 부처님.

고백할께요. 저, 잠시 그 말에 혹했어요. 선생이 되어서는, 아직 철없는 고딩이 하는 그런 말에 홀랑 넘어갈 뻔 했다고요. 으아아, 그런데다 저녀석 미성년자잖아, 정말.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학교 안에서 대체 그런 피도 안 마른 어린 것한테 난 무슨 짓을 당하고 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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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8)

September 20th, 2009

“돈이 좋아요.”

음, 그러니까 아무리 방학중이고 또 아무리 내일은 보충도 야자도 없는 금요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퇴근길에 어린 여제자와 함께 아파트 단지 옆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내려가 토마토 분식집에서 이른 저녁으로 참치주먹밥에 쫄면을 곁들여 먹고, 그리고는 가좌시장 구경을 한참 하다가 한신아파트 놀이터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다분히 불순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나같아도 그런 꼴을 보면 저것들 뭣하는 것임 뭐 그런 생각 안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다가.

그런데다가 대체.

“선생님 뭐예요, 먼저 물어보시고서는.”

“아, 미안.”

그런데다가, 내가 나이가 스물하고도 몇개를 더 먹은 이 나이에, 건장한 대한민국 청년이 되어서는 말이다. 이 나이 이 시국에 숫처녀같이 굴고 싶은 마음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첫키스를 빼앗겼다 이거다. 아니, 술먹고 아스팔트에 부비부비 하다가 입술 다 까진 것 말고, 사람, 그것도 여자사람에게 키스한…… 아니, 당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다. 그런고로 이건 뭐 대략.

하아.

나는 연지를 쳐다보려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귀까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아, 정말 이 기집애, 입만 보이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을 이지경을 만들어놓고 연지 이 녀석은 태연히 저 할 말 다 하고 있다. 대체, 내가 저보다 살아도 몇년을 더 살았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선생님?”

“……응?”

“하아, 어쩔 수 없네요.”

연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중얼거렸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는 게……”

“아, 아니라니까!”

“그럼 말씀해보세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아스팔트가 불어로 남성명사냐, 여성명사냐?”

“남성요.”

“젠장.”

“하지만 길이라는 뜻의 route는 여성명사예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쌤은 길바닥이랑 뽀뽀한 것도 키스로 치시는 거군요.”

“……”

“그런데다가 길 위의 아스팔트와 키스한 것이니까 결국 따지면 3p……”

“얌마.”

“농담이에요. 어쨌건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돈 좋아한다는 말씀은 드렸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자기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담임한테 묻지 말고 직접 물어보라는 이 녀석의 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뭐, 돈 좋아한다고 하면 저희 집이 못 사나 뭐 그런 생각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요즘이 뭐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도 아니고.”

연지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게 언제죠? 저 어렸을 때, IMF 터졌다고 그랬잖아요. 그때 아래아 한글요, 그거 망했다고 그러고 그래서 오빠가 걱정하고 그랬거든요. 집에서도 아래아 한글 쓰고 하니까.”

“아, 알지. 그때 한글 815라고 만원짜리도 나왔어.”

“그때요, 한컴 주식을 5천원에 팔았어요, 주당요.”

“그런데?”

나는 그 IMF 터지고 한컴이 망하네 마네 하던 때가 대체 언제였는지를 생각해보려 애썼다. 그러니까 그기 IMF가 YS 들어가고 DJ 나올 때니까 98년인가 그럴 거고, 그러면 이녀석은 아직 초딩이었을 때인데?

“오빠한테 그랬거든요, 저기, 오빠 돈 모아놓은 것 있으면 한컴 주식을 사자고 했어요. 오빠가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나보고 막 뭐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한컴 주식이 어떤지는 선생님이 더 잘 아시죠? 더 답답한 건 그 무렵에 있었던 주식들이었어요. 옥션, 네이버. 난 그거, 누구건 집에 있는 사람중에 관심좀 가졌으면 했는데. 다들 그런거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잠깐 유행하고 땡이라고. 하아, 정말이지. 유일하게 내 말을 듣고 끄덕끄덕 한 사람은 우리 외삼촌밖에 없었는데. 사실은 외삼촌도 처음에는 한컴 그대로 망하는거 아닌가 했대요. 근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라를 좀 사랑하잖아요? 금방 되살아나잖아요. 사실은 이렇게 돈 좋아하게 된 것도 외삼촌 영향이었을 거예요. 외삼촌이, 주식투자에 엄청 관심있고 또 잘 했거든요. 경제신문 기자였는데.”

“그럼 외삼촌은 돈을 좀 버셨겠는데? 그때 연지 말 들으셨으면.”

“아,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리고 외삼촌은 굴리는 단위가 틀렸어요. 지금 뉴질랜드 가서 그림같은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사세요. 하여간 외삼촌이 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사셨는데, 저 붙들고, 그러니까 우리집에 그런 거 좋아하는 게 저밖에 없으니까, 노는 날이면 저 붙들고 일봉 월봉 보는 거 가르쳐 주고 그랬어요.”

뭔가 조기교육이 심상치 않았다, 이건.

하여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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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7)

September 18th, 2009

“얄밉다고요?”

예상대로, 연지는 내가 가져 온 주간 매일경제를 펴보다 말고 고개를 들며 상큼하게 웃었다.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미소였다. 그린 듯한, 그야말로 미소녀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선생님은 제가 그냥, 전국구 아니고 보통이었으면 좋았겠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왜요, 저 완벽하게 보통이라고요, 쌤.”

잠깐,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반박하고 싶은 말이 200자 원고지 20장은 족히 나올 것 같은데? 루터를 본받아 95개조 반박문이라도 쓰라는 거냐, 이 전국구 녀석아.

“제 기준으로는요.”

“얌마, 네 기준으로는.”

“당연하잖아요?”

연지는 매일경제를 덮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세요.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한들, 제가 인식하는 것이 세계죠. 그런고로 제가 없으면 지금 제가 인식하는 이 세계도 없다고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저 자신인데, 제가 기준이 되는데 뭐가 어때서요.”

“……아는 것 많아서 먹고싶은 것 많겠다.”

나는 툴툴거리며 연지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래도 말이야, 이건 너무 완벽하니까 뭐 할 말이 없잖아. 그래도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인데.”

“그치만 이거 꽤 편리하다고요.”

“편리?”

“그럼요.”

연지는 그 그림같이 단아한 얼굴로, 마치 개그콘서트에나 나와야 어울릴 것 같은 헤벌쭉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냥 적당히 성적 중간, 남들 사이에 섞어놓아도 튀지 않고 그런 애가 쌤 오신 첫날부터 쌤 호모 아니에요 소리 했어봐요. 무슨 사단이 났겠어요? 이왕이면,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압도적인 쪽이 좋아요. 그러면, 저녀석은 원래 저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이라도 있다고요.”

“하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경제 주간지라니. 이런 주간지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무비위크 같은 거나 봤을까 싶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난해한 취미다. 그런데다 여고생이란 말이다, 여고생. 그러니까 이런 나의 기분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그, 네이버 웹툰 정글고에 나오는 그 불사조 여동생의 대사라 이거다. 차라리 야설을 봐, 하는 것 말이다. 아니, 교사 입장에서 학생한테 야설이나 야오이를 보라고 권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제인 오스틴이라도 갖다 읽으라고 해야 하나. 그거면 어쨌건 로맨스의 정석인데다, 세계명작 전집에도 한두권은 꼭 들어 있으니 그쯤 되면.

“이거 재미있어?”

“반지는 고르셨어요?”

“……반지는 무슨 반지야, 학생이.”

“제가 이겼잖아요.”

“……”

“설마, 학생이란 한 약속은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잠깐, 지금까지 패턴으로 미루어볼 때.

“설마 학생을 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므로 교사로서의 양심에 요만큼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쌤 실망이에요.”

그저 가련한 이학도 출신인 나와 달리 문무…… 아니, 문이과를 겸비한 이 녀석과 말싸움을 하는 것은 글쎄, 수산화나트륨 푸대에다 끓는 물을 집어붓는 것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말해두면 될까. 하여간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백일반지까지 사주고 나면 이녀석에게 그대로 붙들려버릴 것만 같아서.

“그게 아니라…… 얌마, 사준다고 해도 어떻게 갖고 다니려고 그래?”

“목걸이 해서 걸 거예요.”

“……”

“군번줄 같은 데다 해서요. 왜요, 교칙 때문에요?”

“뭘 그래, 임마. 졸업하고…… 그래도 선생님한테 반지 받고 싶으면 그때 뭐 하나 사주는게 낫지 않아?”

“정말요?”

“그래. 근데 아마 대학 가면, 생각이 달라질거야. 대학 가고, 1학기만 지내보고 와봐. 그때도 내가 사주는 반지를 갖고 싶으면, 생각해볼께.”

어째서일까. 말하는 내가 더 쓸쓸한 것은.

“만난지 두 달도 되지 않았어. 그런데 아무리 그냥 수능 100일 남은 것 기념이라고 그래도, 반지같은 것 주고 받고 그러는 건 좀 그렇잖아. 신경 쓰이지 않아? 난……”

“선생님.”

“응?”

뺨에, 이녀석의 손바닥이 닿았다. 연지는 양 손바닥으로 내 뺨과 턱을 단단히 붙잡고는 저를 향해 내 고개를 돌려놓았다. 우스운 일이지.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왼눈에, 이 아이의 표정이 그대로 비친다는 것을 공연히 의식하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날 좋아하죠?”

“뭐…… 뭐?”

“좋아해요.”

그리고 이녀석의 손바닥이, 내 두 눈을 덮었다.

며칠 전 술에 취해 도로의 아스팔트 바닥에 운명적 첫키스를 빼앗겼던, 그 순간과는 다른 강렬한 느낌이 어깨를 붙잡았다. 대체 학교에서 이래도 되나요. 아니, 그 이전에 너는 학생이고 나는 선생인데 이게 무슨 짓이야! 이건 그야말로 수많은 야오이에서 몇백번이나 재연되며 골수까지 빼다먹힌 바로 그것.

학생회장이나 반장, 혹은 동아리 회장 공에, 어리버리한 신출내기 선생 수의 그 시추에이션 말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그 “롤러코스터”에서도 열심히 우려먹고 있는. 지금 내가 당하는게 딱 그 짝이다. 세상에, 여자사람과 하는 첫키스가 백주대낮에 직장인 고등학교 구석탱이에서 이 발칙한 제자녀석에게, 그것도 ‘당하는’ 것이라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고자라니를 백만번 외쳐도 시원치 않을 시추에이션이긴 했지만.

“선생님 처음이죠?”

“무, 무슨 소리야.”

좋긴 좋았다.

이래서 남자란 것들은.

“처, 처음 아니란 말이야!”

“정말요? 당연히 처음일 줄 알았는데!”

아니, 잠깐. 그나저나 이 녀석, 내가 지금까지 여자 하나 못 사귀고 살았을 거라고 지금 확신하는 거잖아! 이래봬도 대학까지 나왔는데! 아니, 뭐 물론 여자 못 사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자에게 이렇게 무시당하다니. 나는, 그 운명적 첫키스가 다름아닌 도로 아스팔트라는 소리는 차마 하지도 못한 채, 넋이 반쯤 나간 상태로 연지에게 붙들려 짤짤짤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예요! 선생님이랑 첫키스 한 여자가! 아니, 남자예요?”

“아냐아아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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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6)

September 17th, 2009

인생은 대개 공평하지 않은 법이다. 물론 여기에는 주량도 포함되어 있는데.

“마 선생 얼굴이 그게 뭐야.”

“아아, 예……”

오랜만에 나오신 최 선생님이 어깨를 툭툭 쳤다. 당장이라도 어젯저녁에 먹은 삼겹살로 피자를 부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술 마셨어? 얼마나 마신 거야?”

“아뇨, 어제 이 선생님이랑……”

“이 선생?”

“이정훈 선생요.”

“아이고, 이 화상. 세상에 체육하고 술을 먹냐.”

최 선생님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들 술 잘 먹는 것은 알아줘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술독들은 체육들이라니까. 아니, 마 선생은 군대도 안 갔다왔고, 비리비리한게 어디 술 먹을 데나 있어? 학교 다닐 때도 술 별로 안 먹었잖아.”

“그랬죠……”

“무슨 바람이 불어서 또 술을 푸고 그런 거야. 쯔쯔.”

기지개를 켰다. 어깨가 굳은 느낌이 났다. 친구들은 이제 막 제대하거나, 복학해서 학교 다니고 있을 때인데. 사회 생활이 어렵긴 어려운가보지 하고 생각하다 보니 학교 다니던 것이 마치 먼 옛날 꿈처럼만 느껴진다. 그러니까, 그거 아즈망가대왕에 나왔던 거지? 고3 힘들어도 사회인은 더 힘들어, 어리광 부리지 마, 하고 선생님이 그러는게.

“어쨌건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어. 괜찮아? 마 선생도 이제 좀 들어가서 쉬고 해야지. 첫 방학부터 고생이 막심해서 이거 어떻게 해.”

“괜찮습니다.”

“뭐, 하긴…… 다음 주면 또 방학이긴 하니까.”

“근데요, 선생님.”

술 깨라고 기지개를 켰더니, 생각나버렸다. 일요일에 그 녀석이 했던 말이.

-저 작년까지 이과반이었어요.

“연지 말이에요.”

“연지가 왜.”

“아니, 코스프레는 이제 수능날까지 안 하기로 했어요. 근데.”

“어휴, 그거 좋은 일이네. 이번에 또 한 거야?”

“잡으러 갔더니 있더라고요. 하여간, 수능날까지는 안 하겠다고 신신당부 철저히 약속했으니까 믿어봐야죠. 여차하면 행사 있는 날 학교로 불러도 되고.”

“그거야 그렇지.”

“……”

“왜, 또 무슨 일 있어?”

“선생님.”

궁금한 것은 떠올랐을 때 알아봐야지, 그러지 않으면 질문 자체를 까먹어버린다. 그런데다가 뭔가 궁금했던 것 같은데 싶은 생각은 남아서는, 꼭 화장실 들어갔다가 안 닦고 나온 것 처럼 찝찝하고 꿉꿉한거다.

“연지 이과였어요?”

“응?”

“아니, 이성질체에 대해 꿰고 있어서요. 그거 문과에서는 그렇게 안 다루잖아요.”

최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가…… 이과 맞지.”

“근데 지금 문과잖아요.”

“그렇지.”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그 녀석 입으로 들었던 말이지만, 최 선생님께 다시 확인하고 나니 온갖 곤란한 생각들이 마구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왕따를 당해서 도저히 이과반에 있을 수 없었다든가. 그렇지, 그 녀석 요즘도 교실에서 보면 혼자 창밖 보고 있고 그러잖아. 어떻게 해. 그런 생각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 경제학과 간다고.”

“……예?”

“그녀석 말이야, 아참, 그렇지.”

최 선생님은 우편물 쌓인 쪽을 뒤적거리더니, 반투명한 비닐봉지에 담긴 잡지를 찾아 내게 내밀었다.

주간 매일경제.

받는 사람은 분명히 우리 반, 이연지.

“학생이 이런 걸 보고 말이야. 아, 물론 맥심같은 것을 보거나 뭐 남자들끼리 연애하는 18금 만화책 보는 것 보다야 낫겠지만. 확실히 튀지 않아?”

“그, 그렇네요.”

“이녀석 돈 얼마나 좋아하는데. 주식인지 펀드인지로 돈도 꽤 번 모양이야. 작년에, 겨울에 있잖아. 좀 살림 빡빡하기도 하고 해서 펀드니 뭐니 다 환매하려고 그랬는데 이녀석이 말렸잖아. 미국에 대통령 바뀌고 하면 오를거고, 6개월간은 어쨌건 더 오를 것이며, 그 이후에 대통령이 누가 되었건 상황이 안정이 되면 더 오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때가서 팔라고 얼마나 만류했는데. 하하, 덕분에 지금 꽤 올랐어. 이녀석 말 안 들었으면 억울해서 내가 피눈물이 다 났을 거다.”

“……”

“왜.”

“그러니까 이과였다가 문과로 와서는 수석을.”

“그녀석 2학년때도 전국구였어, 왜 그래.”

“헉.”

굄흘.

자기 반 학생한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선생 인증이겠지만,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괴물같은 것. 그야말로 이건 어디 난다긴다 공부 좀 하던 것들이 저녀석이랑 수업 몇시간 같이 들어보고는 다들 의욕상실해서 널부러져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시추에이션이잖아. 얄미울 정도로 스페샬한 그녀석을 생각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쥔 종이컵을 구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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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5)

September 14th, 2009

“근데, 키싱유에 아는 사람 있다고 하셨죠?”

“아, 예……”

“누구예요?”

“……그게요.”

“내가 맞히면, 이거 쐬주 마 선생이 쏘는 겁니다. 예?”

멋대로 내기를 걸어버리고, 이 선생은 손목을 휙 꺾어 소줏잔을 비우며 으하하, 호걸스레 웃었다.

“누님 아니에요? 저주받은 오른손, 마영진 기자.”

“그, 그걸!”

……그렇다니까, 이 남자. 기자 이름이야 판권 보고 찾아봤구나 하겠지만, 기자마다 붙어있는 괴이한 별명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건 틀림없이.

정기구독자. 아니, 매달 배달받아 보는 것은 아니더라도, 다달이 25일 기다렸다가 서점에서 사들고 퇴근하는 뭐 그런 인물 말이다. 그쯤은 되어야 알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둠의 왼손”, “저주받은 오른손”, “야성의 채찍녀” 등등 뭔가 샤방샤방한 순정만화와는 십리 떨어진 저 조폭두목님같은 닉네임을 구분까지 해가면서 알지. 그런데다 더 큰 문제는 이거.

“근데 그런 귀여운 별명은 어떻게 지은 거래요.”

“귀엽……”

만화가들이 슬슬 그렇게 후기에 등장시키던 것이, 나중에 아예 키싱유에서 이벤트를 한 거다. 기자 별명 붙여주기 이벤트. 물론 뭐 처음에 그렇게 후기만화에 등장시켜서 우리 누나를 저주받은 오른손이니 마감신권이니 그렇게 부르던 몇몇 만화가들은 물론 유명을 달리한 것은 아니지만, 심심하면 잡지에 후기컷을 내놓으며 사실은 마감 째고 도망가고 싶었는데 ‘저주받은 오른손’ 마영진 기자가 돌려차기로 위협하는 바람에 마감을 지키게 되었다며 이 모든 영광을 우리 누나에게 돌리는 바람에 말이다. 우리 누나는 이제 이 바닥에서는 시집도 못 가게 되었단 말이다. 으악.

“독자 이벤트라나 뭐라나…… 독자엽서 집계하더니 그렇게 별명이 붙었다고 그러던데요.”

“오오, 멋진데.”

“근데 만화가 챙기는 독자는 많아도, 뭐 기자를 챙겨요.”

“왜요! 옛날에 그 박무직씨 만화에 나오고 그랬잖아요. 안드로이드 강 같은……”

“그건 그 사람이 아예 별명을 붙였죠.”

“그 무일푼 만화교실. 봤어요? 마 선생은 그때 어렸을 텐데.”

“누나가 만화기자….. 아니, 그때는 만화가 지망생이었는데 못 봤겠어요? 집에 그 책 있어요. 그러고 보면 참, 만화가가 자기 데뷔작으로 만화교실 만화를 그리다니 그것도 참 놀랄 노 자이지만.”

“뭐야, 그게 진짜 첫작이라고요?”

“그렇다니까요. 아니 뭐, 단편은 그 전에도 있었겠지만 그 뭐냐…… 처음 한 연재가 그거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 김준범 선생님이 그러셨다는 거예요. 한국 만화사상 가장 충격적인 데뷔작이라고.”

“으하하하, 그럴 만 하네. 그럴 만 해!”

자, 여기서 미성년자는 아직 알면 좀 곤란하고 어른들은 아마 고개를 끄덕끄덕할 이야기가 있는데, 자고로 술이 술술 넘어갈 때에는 말을 아껴야 하는 법. 불행히도 군대도 안 갖다온 나는 그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삼겹살에 상추를 싸서, 음? 아니, 상추에 삼겹살을 싸서 먹으며 술술술 넘어가는 술을 즐기며 역시 술술 만화에 대한 나의, 차곡차곡 쌓여서 퇴적암이 되다 못해 노력과 근성과 섭씨 5천도에 달하는 정열……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지만 하여간 그 비슷한 것이 더해져 변성암이 되고 남을 지경에 이르는 하여간 그런 것을 술술 불기 시작했으니.

“쥬시카 에도니하고 그리스 밀러 나오는 데 까지는 좋았어요, 복수의 갈채였나? 근데 그 이후에, 연극학교 들어가는 데 부터는 이거 참 알 수가 없어서……”

“오, 갈채. 갈채 본 거야?”

“예에…… 샨 피에슬리도 나중에 이상하게 죽어버리고. 그냥 그리스 밀러에서 끝내지 무슨……”

“아니야, 아니야. 이런 건 처음인데, 김영숙의 갈채를 본 남자를 만나다니!”

“아니 그거야 취향이니까 존중……”

“아니야, 이거 정말 즐거운데? 으하하, 내 마 선생을 사나이로 인정하지.”

“그런 것으로 사나이 인증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여기 있지, 뭐 어때서!”

라든가.

“그거 봤어요? 악의 꽃? 캬아, 어쨌건 제대로 근친물이잖아요. 그것도 쌍둥이.”

같이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고 있거나.

“토노 것은 칼바니아도 그렇고 치키타 구구도 그렇고. 다 좋다니까.”

“치키타 구구 이번에 새로 나오잖아요.”

“오오, 나도 들었는데. 마 선생은 구판 다 갖고 있어?”

“뭐, 집에 만화기자가 있다보니……”

“으하하, 좋은데. 언제 마 선생 집에 놀러가도 돼?”

“오는 것은 좋은데, 만화책은 다 누나 방에 있다고요.”

“가는 김에 누님도 소개시켜주고. 안되나?”

“아이쿠, 좋지요. 노처녀 못 치워서 큰일이었는데. 만화책 싸줄테니 우리 누나까지 데리고 가요, 가.”

뭐 이런 실없는 소리에다가. 그러다 보니 이 선생은, 어느새 술잔이 아니라 소주병째 나발을 불며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난 말이야, 운동 하는데다 이렇게 뭐, 산적두목같은 등빨이다 보니까, 이러고 순정만화 읽고 있으면 정말 이게 아닌거야. 아니, 그래서 나는 순정만화가 좋은데, 내가 만화책 보고 있으면 다들 읽을게 없어서 저런거 읽나보다 하고, 아니, 내가 불의 검을 읽으면서 그 산마로를 그리워하는 아라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고 있는데 와서는 얼마나 재미없으면 그렇게 가슴을 쥐어뜯고 있느냐고, 그러면서 럭키짱이니 대털이니, 그런걸 떠다 안겨주는 거야.”

“저런.”

“마 선생은 그래도, 순정만화 들고 있어도 좀 어울리게나 생겼지. 아니, 거 우락부락한 남자라서 미안하다고 할 수도 없고. 순정만화 보는 게 무슨 죄야.”

글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선생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내 생각은 달랐다. 그냥, 남자답게 생긴 사람이 순정이며 야오이를 들고 읽고 있으면 그냥 호기심에 보나보나 할 수도 있겠지만.

“비리비리하게 생겼다고 순정만화 마음대로 볼 수 있는게 아니에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니, 이야기 못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

“나 처음 발령받았는데, 그날 그 소리 들은 거예요. 선생님 호모 아니냐고.”

“우와, 누구야? 누가 그런 소리를!”

“연지요.”

“이연지? 나이스. 굿잡. 오오오.”

“오오오는 뭡니까.”

“뭐는 뭐예요. 학교 최고의 미소녀랑! 점심시간에도 같이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이 선생인 내 손을 덥석 잡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난 이거 뭐, 교회가 안되면 절도 괜찮다는 말에 10년 다니던 교회 때려치우고 절로 갈아탔는데, 그래도 안생겨요.”

“뭐가요.”

“여친요! 절에는 여자가 많다더니, 가보니까 아줌마 뿐이고. 역시 천주교로 갈아타야 하나, 젠장.”

역시, 이바닥은 지옥이야. 술에 취해 아스팔트에 운명적 첫키스를 바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역시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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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4)

September 13th, 2009

“문과니까 주기율표까지 외울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더라도, 적어도 산소까지만이라도 외워두는 편이 좋아.”

주말동안 풀어올 연습문제, 단답형 50문제를 뽑아서 만든 “이것만 다 외워도 자살방지용 문제는 다 푼다”라는 괴이한 제목을 붙인 프린트물을 나눠주고 나니 점심시간을 울리는 벨이 울린다. 엉덩이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내가 문 열고 나가면 즉시로 식당이건 매점이건 뛰어나가려 꿈질꿈질 눈치를 보는 마흔 명 여자애들에게 슬쩍 눈치를 주며 한 마디를 보탰다.

“담임 선생님 모레 주부터 나오시니까, 너희들 좋은 날도 끝났다.”

“어우우……”

“점심 맛있게 먹어.”

앞문 열고 복도로 나왔더니 벌써 뒷문에서 쏟아져나오는 여자애들을 보고 있노라면, 글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품었던 여자, 특히 여고생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지들이 잘나봐야 고삐리지. 멍하니 넋을 빼고 걸어가는데, 자꾸만 그 말이 생각이 난다.

-저 작년까지 이과반이었어요, 선생님.

최 선생님 오시면 그것부터 여쭤봐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누가 건들거리며 교무실 문을 연다. 이정훈 선생이었다.

“아, 마 선생님.”

손을 들더니,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학굔데요, 짜장면 하나 추가요.”

“예?”

“어쩐지, 탕수육이랑 짜장이랑 시켰는데 또 그게 혼자 먹긴 약간 많잖습니까. 잘되었네.”

혼자먹으려고 탕수육이랑 짜장을 시키다니, 과연 체육교사. 물론 한창 고등학교 다니고 하던 때에야 혼자 피자 반판을 먹을 수 있긴 했지만, 그때도 혼자서 한판을 다 먹는 것은 남들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그때도 운동부 애들은 피자 한판이 뭐야. 오죽하면 우리 학교 근처 고기부페에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제물포고 야구부 사절. 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 야구부가 떼로 고기부페에 갔다가, 가게를 거덜낼 뻔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소위, 여관 창고에 틀어박혀 햄과 술을 모두 마셔버린 아토스가 부럽지 않았다는 건데, 삼총사 읽은 지 오래 되었더니 아토스가 왜 거기 들어갔는지는 가물가물 하네. 버킹검 공작 일로 가다가 그랬다는것은 알겠는데. 그러고 보니 루이 13세나 16세나, 왕비들이 목걸이 때문에 위기에 처하는구나. 하는 등등의, 역사 선생님이라면 당연하지를 외치고 다른 과목이라면 저게 무슨소리인교 하고 생각할 만한 엉뚱한 잡생각을 하며, 나는 어렸을 때 보았던 달타냥과 삼총사에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섞은 동인지를 낼까 하다가 실제로 시대가 얼마나 차이나는지를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길, 루이 14세는 너무 오래 살았어. 15세도 그렇고. 루이 16세가 15세네 아들이 아니라 무려 손자였잖아.

“아이고, 여학교는 심심하네요.”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짜장면을 기다리며 만화책을 펴드는 모습이 어째 심상찮다.

“이거 봤어요? 애들이 보던 건데.”

하필이면 집어든 것이.

“제라르와 자크?”

“애들이 숨겨놓고 보더라고요.”

말려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시나가 후미의 작품인데 뒤에 책 뒤에 19금이 붙어있는 물건 치고 평범한 남자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의 남자와 남자의 애널섹스가 묘사된 물건이 있기는 있었던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일단 남자가 남자끼리의 삐씬 따위를 보고싶을 리 없잖아!

“그, 그거……”

그래서 그거 그만 읽으시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응, 왜요?”

아니, 잠깐. 내가 저걸 그만 읽으라고 말린다는 것은 곧 그 내용을 안다는 이야기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아아.

하마터면 벗겨질뻔한 일반인 코스프레의 가면을 얼른 눌러 쓰며, 나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누나가 그 작가 것 보던데요. 요시나가 후미.”

“재미있어요?”

“글쎄요, 그거 있잖아요. 서양골동양과자점.”

“영화로 나온 그거 말이죠?”

“예에…… 그것 정도는 뭐 괜찮던데. 근데 성인물도 그렸대요, 예전에.”

“성인물 좋죠. 아, 학생들이 보는 것은 안되지만.”

지져스.

나는 프랑스 혁명기, 인텔리 출신으로 아내에게 배신당한 에로소설가와 귀족 출신이지만 남창으로 몸이 팔렸다가 에로소설가의 하인으로 들어오는 소년의 일단, 첫 만남은 유곽에서의 섹스부터 시작되는 그 사랑 이야기를 읽고 저 불운한 체육교사가 잠시 후 보일 끔찍한 반응에 대해 상상하며 차마 시선을 딴곳으로 돌렸다. 복도는 여기저기 버팔로 뛰어다는 소리가 나는 반면, 교무실은 조용하고 한산했다. 문 닫은 것 만으로도 마치, 다른 세상이 된 것 처럼.

이정훈 선생은 뜻밖에도 조용히,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헉.

“……재미있어요?”

“예. 재미있긴 한데…… 마 선생님은 보면 안되겠어요.”

이정훈 선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

“남자랑 남자랑 하는 거예요, 야오이.”

“……”

“뭐, 나야 여자애들 책 압수했다가 몇번 봤으니까 놀랄 것은 없지만. 보통 남자들은 이런 거 보면 아주 역겨워하잖아요. 근데, 여자애들이 보니까 이런 걸 많이 봐요.”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그런거 보면 예전에 우리 야한 만화나 그런거 뺏고 그러던 여선생님들 심정이 이랬을까 싶기도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걸 읽으면서 그렇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아아, 나는.

백만 덕후들이 대학 졸업하고 나면 다 어디로 갈까 궁금했었다. 그랬는데.

“……아참, 탕수육 대짜로 시켰으니까, 마 선생도 사양말고 많~이 먹어야 합니다. 으하하.”

답이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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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3)

September 9th, 2009

사실 서코는 내게 낯설 리 없는 행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1년에도 몇 번씩 신간을 짊어지고 나가서 팔았는데, 낯설고 적응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내 책 없이 맨몸으로 서코에 오는 것도 정말 몇 년만의 일이긴 했다. 인쇄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재고만 잔뜩 남는 것 아닐까 조마조마 걱정하는 일 없이, 그냥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남의 회지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름 즐거운 일이었다. 정말로, 즐기러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물론, 행사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오늘의 목적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저녀석이 진짜.”

아무래도 오늘의 목적은 좀 예상보다 빨리 달성한 것 같은데.

짧고 하늘하늘한 연노랑색 나시 블라우스에 밝은 주황색 프릴 치마, 손목과 목에는 진한 주홍빛 리본을 묶고, 결정적으로 머리에다 초록색 가발을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내 네녀석을 못 알아볼 것 같으냐.

“이녀서어어어어억! 고3이 뭐 하는 짓이야!!!!!!”

“아, 오셨어요?”

“아, 오셨어요, 라니.”

대체 이녀석, 아무리 서울대마저 안전빵인 신의 성적이라지만 이래도 되는거냐!

“지금 너 고3이거든? 야, 몇 달만 참으면 되는데 그걸 못 참아서 여기 있는거냐?”

“알아요. 곧 100일이잖아요.”

“그래, 100일. 석달!”

“그러니까, 100일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나왔어요. 거기다가 100일 지나고 나면 이거 또 유행 확 지난다고요. 원래 지난달에 입고 나오려고 한 것, 그때 경시대회 나가느라고 이번달에 입고 나왔는데.”

“얌마, 썩어도 준치라고…… 30년전 민메이가 아직도 민메이야. 그놈엣것도 마크로스인데 고작 몇 달을 못 버티겠어?”

“그러니까 말이에요, 선생님.”

연지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이걸 보고 마크로스라는 걸 바로 아는 교사가 얼마나 되겠느냐고요.”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고 3 노는 것은 며느리도 모른다고, 나 또한 고등학교 다닐 때 만화며 소설이며 좀 끄적거렸느냔 말이다. 하지만 교사로서, 이녀석네 반 부담임으로서, 이 학교에서 당당히 서울대에 보내야 할 녀석이 이 귀중한 시간을 란카 코스프레나 하며 보내게 하는 것도 직업윤리상 좀 거시기한 일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끌고간다고 말을 들을 녀석이어야 말이지.

“좋아, 그러면 나랑 내기하자.”

“내기요?”

“어, 화학문제 하나 낼 거니까. 어때?”

“맞히면 오늘 여기 있는 거, 뭐라고 안 하시는 거죠? 담임한테도 말씀 안 하실 거죠?”

“그래. 하지만 틀리면……”

“틀리면 순순히 집에 가서 공부할게요. 대신 그 문제 맞히면요.”

“잠깐, 잠깐. 아무리 그래도 이 달이 마지막이야. 8월엔 안돼.”

“안 나와요. 수험생인데.”

“그럼 뭔데.”

“백일반지요.”

뭔가 단어를 잘못 골랐거나 들었거나 하는 것 같은 기분이 살짝 드는데 이거.

“100일 남았을 때 하는 반지 있잖아요. 선생님이 그거 해주신다고 하면.”

“야, 얌마.”

아니,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런고로 이 녀석이 단어를 잘못 고른 거다.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런 멍청한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은!

“반지는 사귀는 남자한테 받는 거지! 넌 선생이고 난 학생이야!”

“……바뀐 것 같지 않으세요?”

“……”

“싫으심 말고요. 설마, 학생들에게 낼 비장의 문제도 하나 없으신건 아니죠?”

“……좋아, 너 대신 못 맞히기만 해 봐.

그래, 뭐. 머리 좋고 예쁘고 무엇 하나 빠질 데 없다고 해도, 고등학생에게는 고등학생에게 배우는 게 있는 법이다. 일단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는 가르치되, 웬만하면 수능문제 근처에도 안 나올, 그래서 웬만하면 문제집에서 구경할 일도 별로 없을뿐더러 따로 개념정리 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을 머릿속에서 급히 찾아보았다. 그리고는 피카츄 너로 정했다를 외치는 지우의 심정으로 문제 하나를 끄집어들었다.

“이성질체 알아?”

“뭐, 대충은요.”

아주 인생의 쓴 맛을 보여주지. 나는 어금니를 악물며 생각했다. 아무리 풋내기 화학선생이라 해도, 이런 고삐리한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짐짓 별 것 아닌 문제인 체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고등학교 때 깊이 배우는 것 아니니까 어려운 것은 안 낼께. 이성질체에 어떤어떤 거 있는지 아는대로나 말해봐.”

“먼저 구조이성질체가 있고요.”

어라.

“이건 분자식은 같은데 탄소골격이나 불포화 결합이나, 그렇지 않으면 작용기가 다를 때 생겨요. 연쇄 이성질체는 노르말, 이소, 네오. 위치 이성질체는 오르토, 메타, 파라.”

이건 뭔가 아닌데. 대체 뭐 이렇게 청산유수야.

“그게 다야?”

“입체 이성질체는 이중결합을 하고 있는 탄소원자에 원자단이 결합될 때 상대적 위치가 달라서 생기는 기하 이성질체가 있어요.”

무슨 옛날옛날 본고사 세대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줄줄 꿰고 있을 필요가 아마 없을텐데? 어째서 이걸 다 알고 있는 거지?

“기하 이성질체로는 시스 형이랑 트랜스 형. 그거 말고는 편광성이 달라지는 광학 이성질체가 있고요. 근데 선생님 그거 아세요?”

“뭘?”

“이거 이과 문제예요.”

쾅, 머리 속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냥냥 냥냥 니하오냥, 요상한 춤을 추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연지가 씩 웃으며 한 마디 보탰다.

“저 작년까지 이과반이었어요, 선생님.”

월하의 동사무소….의 장르는 수학덕후물이었습니다.
이건 아마….. 곱게 원 목적대로 로맨스로 가면 다행이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화학덕후물이 될 것 같죠?
참고로 물리덕후물도 지금 시놉시스 써놓은게 있답니다. 훗……

참고로 저는, 물리보다 생물이랑 지구과학을 훨 잘했습니다.

하나 더.
오르토, 파라, 메타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연습장 4권 분량으로 썼던 SF….의 주인공과 그 자매들이었고.
시스, 트랜스는 여주를 사랑하는 남자 두 놈의 이름이었습니다. 노르말, 이소, 네오는 아마 우주선 이름으로 썼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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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 ,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2)

September 5th, 2009

“그래서 걱정이야? 그런 어린애 좋아하게 될까봐서?”

“응.”

대답해 놓고도 내가 한심하다. 바로 얼마 전까지, 그녀석이 나한테 했던 그 폭탄 발언 때문에 잔뜩 찌그러져 있었으면서.

“어리긴 뭐…… 네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 다지만 네살은 아니고, 다섯살 반 차이나는 거 아냐.”

“……”

“겨우 다섯 살 반이면, 야, 학교 가서 예비역을 사귀면 그쯤 나오겠다. 뭐 고민이야, 고민은.”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다 애가 워낙 퀄리티가 좋다며.”

“응.”

“수능 얼마나 나오는데?”

“0.1%”

“최고성적이?”

“아니, 거기서 떨어진 적 없어.”

“대단하네.”

이쯤 되면 누나도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서울대 확정이야?”

“응, 서울대. 그래서 학교에서도 수시 쓰지 말고 정시로 가라고 밀고 있어. 어차피 얘는 수시로 붙으니까 다른 애 추천한다고.”

“그게 뭐야.”

“그러게. 일찍 대학 확정해 놓고 수능만 웬만큼 봐도 좋을 텐데.”

“걔네 엄마가 학교에 뭐 안 하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런건 모르겠어.”

솔직하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니라고 말한들 누나가 믿을 것 같지도 않고.

“딱 봐도 그거네 뭐. 애가 돈은 엄청 좋아한대지, 전교 1등인데 학교에서 수시 추천도 안 해주고 그러면. 딴 거 있어? 너는 너 혼자서도 서울대 갈 능력 되니까, 알아서 하려무나. 그런 거.”

뭐, 누나 말대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좀 들긴 들었다. 그 애 정도 되면야.

“어쨌건 고생이 많네, 동생. 나한테 선은 언제 보여 줄 건가?”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여고생 이야기만 나와도 얼굴색부터 다른데. 그렇게 두근두근 좋아 죽겠어서 못 살것 같냐?”

그렇게 얼굴색이 달라질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그녀석이랑 그, 눈 이야기 하고 난 뒤로 자꾸 그 웬수같은 것을 피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정말로 뭔가 숨길 수 없는 것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버릴까봐서.

“근데말이야.”

“응.”

“서코잖아, 내일.”

“응?”

“……네 그 제자아이 말이야, 코스어라며. 이번에는 뭐 없대?”

응?

그러니까 말이다, 굳이 내 변명을 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야말로 내가 나온 대학교의 내가 나온 과란, 여자사람은 가끔 창 밖에 지나가는 생태계의 일부로서…… 하여간 생태계상에 존재는 하는데 우리랑 같이 사귈 가능성은 전무한 그런 존재라고 선배들이 세뇌를 시켰다 이거다. 그래도 우리 과는 그 여자사람이 몇명이라도 들어와 있었지. 나 입학하던 해에도 여자 한 명도 없었던 기계과는 뭐라고 했더라.

“여자는 신이다!”

학생회장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지, 여자는 신이다. 너희 미천한 인간들과 함께 자리할 존재가 아니라고. 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그러다 보니 인간들이 다들 연애세포가 죽어버리는 거다. 방사능에 노출되어 대머리가 되듯이, 그런 환경에 노출되다 보면 처음에는 어떻게든 연애라는 것을 해보려고 문과대를 기웃거리며 온갖 추태를 부리다가, 나중에는 그냥, 그냥 받아들이는 거다.

그러고 살다보면 공부 잘해서 연구원이 된다던 선배는 졸업하고 어느 산골에 있는 남자들만 가득한 방사능 연구소 같은 데의 기숙사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고, 아니면 프로그래밍으로 잘 나가는 놈은 결혼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T 모 소프트 같은 데 취직했다가 정말 연애도 못하고 직장상사들이 노총각으로 늙어죽거나 용케 결혼했어도 이혼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보며 그렇게 청춘을 흘려보내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쩌다 사고로 군대는 면하게 되었지만, 나라고 딱히 이런 핑크빛 시추에이션이 익숙할 리 없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애초에 최 선생님이 그녀석 코스프레 하니까 좀 뜯어말리라고 했다는 사실따위 내 뇌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는 말이다. 설마 이 녀석, 그걸 노리고 나한테 살랑거린 거라면 좀 고수인데!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틀림없이 악마와 친구먹었을 우리 누나가, 안경 너머로 미묘하게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는 것은 느끼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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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1)

September 4th, 2009

“요즘 마태오 작가 스토리 아주 물이 올랐는데 그래?”

그러니까, 요즘 말로 엣지있으신 키싱유 팀장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내가 전부터 그랬잖아. 다 좋은데 뭔가, 아주 미묘한 거. 여자애들의 하트를 확 날려버릴 그런 아슬아슬 미묘하고 그런게 살짝 부족하다고. 근데 정말 여학교 물이 좋긴 좋네. 거기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것을 다 쓰고 말야. 아휴, 내가 봐도 두근두근 벌레벌레 도키도키한 것이 아주 그냥 죽여준다, 죽여줘. 색기가 좌르르 흐르네. 아휴.”

“저기, 팀장님…… 그거 여고생들이 보던데요.”

“응?”

“뭐랄까…… 그러니까 저기 그…… 베드신 같은 건 좀 적절히 자제하는 게……”

“여기 베드가 어디 나왔다고 그래, 베드가.”

“……”

“과학실 실험대에 묶어놓고 덮치게 만든 거 자기잖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요. 그……”

“학교선생 되었다고 티 내는 거야? 갑자기 웬 고리타분한 소리야?”

“……”

“그럴 거면 이렇게 색기가 좌르르 흐르게 스토리를 쓰지 말든가. 봐봐, 이거 콘티 얼굴에 이름표 단 졸라맨만 잔뜩 나오는데도, 대사만 읽어도 이런데 말야. 영아씨 보고 이번에 힘좀 팍팍 주라고 해야겠네. 이번에 1등 한번 먹어보자고.”

“예……”

“지금 보니까, 요즘 그거 한다잖아. 탐나는도다.”

“아, 예. 해녀 나오는 거요.”

“그래그래, 거기 황찬빈이라고 나오잖아.”

“윌리엄 역 하는 애요?”

“그래, 그러고 보니 거기도 윌리엄일세. 우리도 이거 좀 잘 해서, 드라마도 찍고 그래보자. 마 기자가 그런 말 안 해?”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 못 하죠. 대체 이거, 삐리리한 장면에 정작 중요부위는 근처도 안 나와서 그렇지 콘티만 놓고보면 적나라한 게 19금에 빨간딱지 안 붙는게 다행인 만화인데.

“에이, 설마 되겠어요.”

“아니, 왜 그래.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몰라?”

“전 소년이 아니라서 야망도 없어요, 팀장님.”

“웃기지 마, 이거 잘 되어서. 그래, 윌리엄 웰치스 역으로는 역시 우리 찬빈이, 황찬빈이 캐스팅해 놓고. 하아, 그러면 또 우리도 그 김에 집중탐구 취재같은 것도 하고. 얼마나 좋니.”

뭔가 대단히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농후한 대사였지만, 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 누나부터 시작해서, 주변 여자들 이러는 것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고.

“지난달까지는 동방신기 좋다고 그러셨잖아요. 이제 바뀌신 거에요?”

“무슨 소리야. 마태오 작가는 그럼 소녀시대랑 카라랑 브아걸 중에 하나만 고를 수 있어?”

할 말이 없네요.

어쨌거나 뭐, 나름 휴가 쓰겠다고 위에 보고까지 하고 나왔는데 말이지. 생각해보니 방학인데 좀 비참하긴 하다. 중학교 선생이었으면 이런 방학에 놀 수 있을텐데. 그래도 다들 중학교 가는 건 좀 말리더라. 특히 여중은 말이지.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선생이 너무 부족해서, 과목이나 학년에 상관없이 남교사는 체육대회 준비부터 학교에 뭐 행사 있을 때 마다 끌려다녀야 한다나 뭐라나. 그렇다고 대놓고 다리를 절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장애 있다고 빠질 수도 없을 노릇이고. 고등학교는 그나마 행사도 적고, 비교적 남자 선생님들도 많이 오다 보니 좀 낫기는 낫다. 앞으로는 하늘이 무너져도 3학년 근처에도 오지 말아야지, 에이.

어쨌건 오늘 누나랑 영아씨도 다 모인 까닭이야 뭐. 3권 표지 회의하고, 그리고 편집장님의 정기적인 작가관리랄까 뭐랄까 뭐 그런 것. 영아씨의 희망에 따라 회사 근처의 초밥뷔페에서 밥을 먹으며, 말이 좋아 작가관리지 이건 뭐 아줌마 푸념같은 자기고백의 시간이 이어진다.

“여학교는 어때?”

“뭐, 매일매일 성희롱 당하는 기분이에요.”

“젊은 총각선생님 왔으니 애들이 궁금해 할 만 하지. 그것도 하루이틀이야. 몇년만 지나봐, 지금 그 애들의 열화와 같은 관심과 성원이 그리울걸?”

“……그럴까요?”

그럴 날이 오기는 올까 생각하면서도 뭐. 떠오르는게 왜 다 이럴까.

대체 그 바쁜 고 3들이 남의 있지도 않은 첫사랑에는 왜 관심을 갖는 거냐고! 너희들 일촌광음 불가경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그런데다가.

“……그냥 만화책인데요.”

아니, 공부 포기한 건 알겠는데 말이지.

수업시간에 그냥 조용히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긴 한데.

며칠전에 새로나온 신간 에로만화를 딱, 끼고 앉아서 보고 있으면서 그냥 만화책이라고 하면 어떻게 해! 표지에는 그야말로 느끼고 있는 표정의 공수 서로 즐거운 형상, 이 떡하니 그려져 있는데! 내가 이게 뭔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아냐! 나도 이거 읽어봤지만 씬 장난 아니었거든! 전에 보니 비키니 수영복 입은 스크린세이버 같은 것을 사무실에 틀어놓는 것도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면 성희롱이 될 수 있다고 하던데, 총각선생 앞에서 남자와 남자의 애널섹스에 대한 판타지를 그린 만화책을 보는 것은 희롱이 아니란 말이냐!

하아.

그러니까, 사실은 그래서 더. 그런 말을 들어놓고도 연지한테는.

적어도 그 애는 수업시간에는 나름 집중하고, 취미생활은 또 따로 하고 있으니까.

나름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점도 좋았고. 그랬는데.

-……앞으로는 선생님 오른쪽에만 있어야 겠어요.

두근.

부정맥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번 엇박자로 달리기 시작한 심장은 어지러울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람을 뒤흔들어놓는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잘 보이라고요.

그 눈동자를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 여고생인데, 어린아이인데. 그런 애를 두고 지금 뭐 하는 거야, 학교 선생 씩이나 되어서.

“마 작가 괜찮아?”

아뇨.

미칠 것 같았다. 너무 심하게 두근거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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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20)

August 31st, 2009

“우와, 그러면 정말로 누님이 그거예요? 담당기자?”

“어.”

총알 하나 피하다가 대포 맞아 죽었네~ 뭐 그런 노래가 있었던 것도 같다. 초등학교 다닐 때 말이다. 지금 내 상황이 대충 그러하였는데.

“설마 정말로 그 담당기자라는 사람들, 검강을 쏘고 목도를 휘두르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닌데, 내 옛날 책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은 해.”

“어떻게요?”

“아, 옆에 와서 앉아서 그걸 읽어. 소리내서.”

“아하하하하, 그거 끝내준다.”

교무실에서 나왔더니 이녀석에게 걸려서, 이런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낱낱이 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콤 윌킨슨 버전의 그 레미제라블 마지막 곡에서, 살짝 거칠고 힘없는 목소리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발장이 유언을 남기듯 부르는 그 노래에서 On this page, I write my last confession 하는 대목이 머릿속에 빙글빙글 돌아다니는데, 정작 나는 개과천선을 넘어 성불까지 한 장 발장과는 아무아무 상관없이.

“근데 너.”

“예?”

“내 비밀은 이렇게 탈탈 먼지 하나 안 남기고 털면서, 네 이야기는 왜 안 하는데?”

“원래 여자는 좀 비밀이 있어야 해요.”

“비밀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런 어린애한테 쓴물 단물을 다 빨아먹히고 있는 중이었다.

고 나는 감히 생각했다.

“초점이 안 맞아요.”

“응?”

“왼쪽 눈요.”

나는 얼른 눈을 깜빡였다. 아주 멀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 실험실에서 약품이 튄 이후로 거의 보이지 않다 보니, 자세히 보면 티가 나기는 난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 그게……”

“한쪽 눈만 많이 나쁜 거예요?”

안경 너머로, 연지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반짝반짝하는, 햇살 아래 밤색으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몇 번이고 망설이고 고민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어, 그래.”

“많이 안좋아요?”

“사실은 거의 안 보여.”

“어쩌다가요!”

“……대학때 실험실에서 약품이 튀어서. 그래도 뭐, 겉보기에는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으니까 말야.”

“어떻게 해.”

“뭐…… 군대 안 간 것도 사실은 이 사고 때문이고. 그건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적당히,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려고 했다.

“……앞으로는 선생님 오른쪽에만 있어야 겠어요.”

“응?”

그냥 뭐, 다들 어디든 흉터 한두 개는 있는 거잖아, 살면서 뭐 찧고 부딪히고 다치고. 난 그게 좀 재수없게 눈이었을 뿐이지. 그런데 그게 그 순간 갑자기 막 특별해졌다.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건 그렇게 다치는 것 중에서도 좀 특이한 쪽이라는 사실도, 그것 때문에 군대를 안 갔고 장애 등급을 받았으며, 교사 시험에서 약간이나마 가산점을 받았다는 사실도 그때는 떠오르지 않았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잘 보이라고요.”

“……”

다만, 오른손등을 꽉 누르는 그 애의 손바닥이, 내 왼눈을 들여다보는 그 애의 눈동자가.

세상의 전부였다.

스물 네 살, 그 해 7월.

그렇지 않아도 누나 때문에 범상치 않게 흘러가던 내 인생은, 나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거의 기록적인 속도로 연애물이 되어가고 있군요. 아, 제가 쓴 것 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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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9)

August 30th, 2009

“방학인데도 맨날 나오네요.”

더웠다.

그러니까 인생, 속은 놈이 바보인 거다. 방학 내내 포시랍게 놀며 반바지 차림에 동네에서 하드를 빠는 행복한 나날이라니. 그런 꿈같은 날이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올 리가 없잖아.

초등학교 선생이면 또 몰라도, 나도 고3시절을 보냈으면서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때 우리 감시 감독한건 다 선생들이었잖아. 그러니까 나도 고등학교 선생이 된 이상 말이지, 방학때 놀고 있을 수 없다 이거다. 아아. 그런데다 국영수 중심으로 들이파는 것에서 슬슬 암기과목에 전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가 도래한 지금, 신출내기 화학교사라고 집에서 띵까띵까 놀고만 있을 도리가 있냐.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 까지 쟤들을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적어도 교육부 장관 생각에는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보편타당하게 들어있어야 마땅할 그런 암기과목들을 아주 처넣고 쑤셔넣고 구겨넣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러게요…… 하하.”

그런데다가 최선생님네 애도 또 아파서.

부담임이기도 하겠다, 수업 없는 날은 슬그머니 안 나오려고 했는데 또 애가 아파서 출근 못 하신다는데 어떻게 해. 그런데다 그냥 문제집 풀이만 해도 되는 시점이기도 해서, 최선생님 수업까지 내가 들어가게 생겼다. 아니 물론 다 들어가는 건 아니고, 2학년에 화학 선생님이 또 들어오시지만. 적어도 하시던 분들이 이과 화학을 들어가시니까 문과 화학이라도 내가 들어가야 한다는 게 포인트.

“근데 이선생님은 왜 나오셨어요.”

“……김선생님이 애 데리고 현장학습 가셨어요.”

“저런.”

그래서 학기중보다도 더 녹초가 된 내가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옆반 국어선생님 김선생님네 반의 부담임, 이정훈 선생님. 나와 함께 발령을 받았고, 체육 선생님이다. 물론 군대도 다녀왔으니 나보다 나이야 훨 많지만.

“뭐 체육선생이 할 건 없지만 애들 생활지도라도 해야 하고.”

“고3은 역시 힘드네요.”

“그거야 선생님이 체력 관리를 안 해서 그렇죠. 운동 안 하죠?”

“아, 뭐……”

“이따가 끝나고 테니스라도 칩시다. 하하.”

그러면서 이정훈 선생은 기지개를 켜고는 구석자리 소파에 가서 코를 처박고 누웠는데.

“뭐, 뭐 하는 거예요!”

“잠깐 자요.”

이 사람이 수업도 없으면서!

“……저기 다른 선생님들 오시면.”

“물론 비는 시간은 대충 다 체크하고 있죠. 이 시간에야 교무실에 나 빼고 세 분밖에 없는데, 샘 빼고 두 분이야 밖으로 점심 드시러 나가시니까 상관없고.”

“……”

“교재연구 중이에요, 교재연구.”

“잠자는게 교재연굽니까!”

“내 몸이 교재잖아요.”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러면 이 김에 나도 나가서 소주라도 깔까. 그것도 교재연구는 교재연구지, 알코올에 대해 몸으로 실험하고 있었다고 말하면!

……잘도 먹히겠다.

“그거 알아요? 내 자리 밑에 만화책 있어요. 필요하면 갖다봐요.”

“만화책요?”

“애들이 보는 거 빼앗아 왔거든요. 하하…… 여자애들 만화책도 제법 재미있던데요.”

“그래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이정훈 선생의 손에 들린 잡지가 어째 낯익다.

에, 그러니까.

상반신이 헐벗은 차림으로 어째서인지 괴로워하고 있는 윌리엄 웰치스의 모습.

이 큼직하게 그려진 이번 달 키싱유 말이다.

“헉!”

“왜요?”

“아, 아니…… 아는 사람이 거기 기자거든요.”

“오, 기자. 기자 좋죠. 여친요?”

“아뇨……”

조금 말을 아낄 필요가 있다.

“근데 그거 재미있어요? 여자애들 보는 거라서 영……”

“어, 지금 이거 롤러코스턴가 하는 거 보고 있는데.”

뜨끔.

“재미있어요. 원어민 교사 나오고 남자 고등학교고.”

“여학생들이 남자고등학교 이야기도 보고 그러네요.”

“에이, 우리도 학교 다닐 때 여자애들 나오고 남녀공학 나오고 하는 거 다 봤잖아요. 그 뭐야. 뭐, 나도 여기 와 보니 완전히 환상 깨지긴 했지만.”

“음?”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같은 것도……”

왓더헬. 이 남자 그런 걸 봤단 말인가!

“거기 나오는 청순한 여자애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는 여학교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불태웠는데.”

이봐요, 아저씨…….

“막상 와 보니 이건 뭐…… 젠장.”

“여학교의 실상이라면 이빈의 걸즈가 훨씬 리얼하죠.”

“오, 그거 봤어요?”

“……봤어요, 이 선생도?”

“무라이, 무라이 귀엽지 않아요? 마 선생은 어디서 봤어요?”

잠깐, 여기서 말리면 안 되는데.

“누나가 있어서 말이죠……”

“아하.”

이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있다는 말 한 마디로 대충 다 해결이 된 것 같기는 한데, 어쨌건 주의를 하기는 해야 할 노릇이다. 보라고, 여자애들 만화책도 제법 재미있다고, 그야말로 그런 쪽을 처음 보는 것 같이 말하는 주제에.

이빈의 걸즈를 읽었다 이거지. 아니, 뭐 읽었을 수는 있지만, 무라이 귀엽다고 저러는 걸 보면 이건 대충 읽은 솜씨가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내, 이 일반인 코스프레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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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8)

August 27th, 2009

“그러고 싶어?”

빕스의 샐러드바를, 그 가격이 아깝지 않을 만큼 쑤셔넣고 우겨넣는 두 여자들을 보며 나는, 여자들의 위장은 간식 배 밥 배 심지어는 케이크 집어넣을 배 까지 따로 파티션이 되어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요하면 외장하드도 장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 깨달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위장이 4차원으로 연결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집에가서도 한참은 허덕거리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뭘.”

“누나야 수십년 전부터 하드한 동인녀였다는 것은 알지만 말야……”

“웃기지 마.”

만족스러운 금요일 저녁을 영화 한 편으로 마무리하려는 듯 DVD를 골라 넣고 길게 누워 배를 두드리던 누나는, 나를 흘겨보며 발끝으로 쿠션을 끌어당겼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남도 아니고 동생을 두고 총수 어쩌고 하면서 그런 말이 나와?”

“너도 이 일 해봐.”

누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감증이야”

“……무슨 소리야?”

“문자 그대로야. 느낌이 안 온다구.”

영어를 그다지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누나가 틀어놓은 영화 속 인물들이 영어로 떠들고 있지 않더라는 것은 알겠다. 어깨 너머로 고개를 슬쩍 틀어 화면을 돌아보자, 무슨 80년대 영화같은 덜떨어진 품질의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야 DVD가 아니라, 무슨 피디박스 같은 데서 PMP용으로 부러 다운받은 저화질 영상이라고 해도 믿겠다.

“이런 걸 봐?”

“가리지 좀 마.”

누나는 발로 내 엉덩이를 밀어내며 쿠션을 안고 소파에 파묻히듯 기대어 앉았다.

“내가 말은 그렇게 하는데……”

“응?”

“어떤 것이 재미있는지는 아는데, 전처럼 설레고 꼴리고 두근두근하고. 그런 게 없어. 즐기질 못하겠다.”

“아니, 왜?”

“키싱유 말이야……”

누나의 손톱이, 그러니까 아마도 퇴근길에 부평 지하상가 네일숍에서 만원을 주고 반짝반짝 그라데이션을 줘서 바르고 왔을 그 손톱이 쿠션의 시접을 푹 파고들었다.

“지금 순정만화 쪽에 성인지가 별게 없잖아. 예전에야 나인 있고 화이트 있었지만.”

“어.”

“보다보면 파티랑 윙크가 중고등학생들이 보고, 이슈가 조금 더 위까지 보고. 그 위가 없었잖아. 키싱유가 나름 틈새시장을 노린 것이거든, 틈새시장.”

“그래서 야오이……”

“레이디스 코믹과 BL이겠지.”

“그거나 그거나.”

“작가라는게 개념이 없어. 어쨌건 이슈보다 조금 위, 그러니까 고등학생 대학생 20대 보라고 만들었잖아. 19금 찍을 것은 없어도 분위기는 좀 므흣하게 끌고가고 그래서. 근데 그랬더니말야, 만화 공모전을 하건 스토리나 소설 공모전을 하건 이건 뭐.”

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쿠션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갑자기 쿠션을 내 면상에 휙 집어던지며 일갈했다.

“아, 씨발. 들어오는 원고마다 기섹섹섹섹섹섹결이면 어쩌라는거야!”

음? 뭐라고?

“기섹섹섹섹섹섹결!”

“무슨 소리야?”

“기승전결 알아?”

“어.”

“시작이랑 끝은 있는데…… 그 사이가 오로지 떡치는 이야기밖에 없으면 어쩌라는 거야! 아, 젠장. 언놈은 소설 첫 대사가 벗어, 야. 벗어. 그리고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떡만 쳐! 야, 진짜 변강쇠가 살아 와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 공모전 같은 것 한번 하면, 그나마 볼만한 것 골라낸다고 붙들고 앉으면 한달 내내 밤새도록 그런 것만 보는데, 듣기좋은 꽃노래도 하루이틀이지, 사시사철 그딴 것만 보고 있어봐라, 두근거리는 건 고사하고 꼴리게라도 생겼나.”

아멘.

나무아미타불 아멘 인샬라.

“씨발, 그런데다 말이야. 이건 이젠 호모소설을 남자가 써서 보내는 놈들도 꽤 많기는 많아. 여자가 꼴리는 포인트를 모르고 그냥 쌩 쌍팔년도 노루표 비디오모냥 처 박기만 해서 탈이지. 근데말이야!”

듣고 보니 좀 불쌍하긴 한데 나한테 화내지 말라고요.

“지난번엔 세상에, 언놈이 지 헐벗은 사진을 같이 첨부해서 보냈는데, 거기 사진에 뭐라고 써있었는지 알아?”

“뭐라고 써있었는데?”

“웃흥.”

“……”

“아놔, 진짜 다 죽여버리…… 아니, 경찰에 신고해버리려다 참았다.”

담배를 물 듯이, 모나미 153 볼펜을 물고.

그 하얀 플라스틱 끝을 잘근잘근 깨무는 누나를 보며 나는 한참동안, 공연히 부끄러웠다.

“……미안.”

“뭐가.”

“나도 이런 거 쓰잖아. 그것도 막 귀축에……”

“넌 스토리라도 있으니 됐어. 마감이나 잘 지켜, 선생 되었다고 풀어지지 말고.”

“어.”

좋아하는 일이 진짜 직업이 되면, 싫어진다고. 그런 투정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영화에 집중하는 누나의 옆모습을 한참 쳐다보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릭해주시면 감사감사.
그리고 말인데요.

요즘 타로 카드를 배우고 있습니다. 아, 조금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근데 매주 숙제를 해가야 하는데 주위에 마루타가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번 주말에도 가야 하는데 숙제가….!!!!

혹시 타로점이 필요하신 분은…… 이름이나 개인정보를 보일 만한 부분은 가려서 블로그에 게시하는 대신 간단하게 봐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 재미있으실까요? 어떨까요? 어차피 이 블로그 조용하니까 주에 한두 분이라도 봐드리면.

참고로 날림으로 대충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은 그 바닥에서 이름대면 다들 아 할만한 분. 제가 좀 멋대로 해석을 붙이는 경향이 있어서 탈이죠. 음. 이제 드디어 반년 되었네요. 배우기 시작한지는. (긁적) 뭔가 공식화할 것 까지는 아니고. 방명록에 보시면 비밀글을 쓰실 수 있거든요. 블로그 방명록 말고 홈페이지 방명록 있으니까 필요하신 분은 살짝 덧글 남기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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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7)

August 26th, 2009

“마리아님이 보고계시겠네요. 으하하.”

“마리아님은 무슨. 실사가 청순해봐야 뻔하지.”

7월 17일, 원래는 제헌절이었어야 하는 이 날은,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무늬만 방학식’인 날이다. 수능 전의 마지막 방학이니까 나름 길이길이 기려 줄 만도 한데, 아무리 고3 노는 것은 며느리도 모른다고 해도 또 대놓고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 대한민국 고3의 비극이라서.

“그래서, 뭐 어쩌기로 했어요? 사귈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이 학생이랑 어떻게 사귀냐고요오……”

“왜, 지금 고 3이면.”

“그렇지? 우리 마태오가 좀 젖비린내가 풀풀 나서 말야.”

“대충 네다섯 살 차이 나나? 마태오씨 학교 일찍 들어갔죠?”

“맞아. 어떻게 알았어?”

“지난번에 2월생이라고 그랬잖아요. 마대리님이. 우와, 네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다는데. 잘 해봐요.”

“그러니까 지금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냐고요!”

어쨌거나 이 날은, 내 첫 월급날이었다.

다시말해, 누나와 영아 씨에게 털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것도 빕스에서 말이다.

아니, 빕스 정도야 대수롭지 않다고? 그거야 여자친구와 룰루랄라 가는 사람이나 그렇지! 누가 누나랑, 그림작가랑 같이 가는 것은 충분히 대수로운데다 그런데다가!

“여기 밥값 너무 비싸.”

아깝기까지 하단 말이다! 젠장!

“뭘 빕스갖고 그래.”

물론 사악하기 그지없는 누나는, 한떨기 아저씨같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조선호텔 뷔페에 갈까 했는데 말이야.”

“카페로얄요?”

“아니, 코엑스에 있잖아. 비즈바즈라고.”

“시끄러워요.”

조선호텔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박봉의 학교선생을 벗겨먹으려 들어도 유분수지.

“아, 너무해. 솔직히 스토리 써봐야 쥐꼬리만큼 받잖아요.”

“뭐예요, 난 스크린톤에 뭐에 잔뜩 드는데, 마태오씨는 연습장이랑 볼펜만 있으면 되면서.”

“……설마 아직도 수작업 하는 거예요?”

“설사 수작업 아니라도 그림작가 쪽이 힘들 구석 돈들 구석 더 많지, 뭘 그래.”

그런데다 누나마저도 영아씨 편.

아니 뭐, 그림하고 글의 차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편들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맥빠진단 말이다.

“좋았어, 이번 기회를 그동안 수련하지 못한 노멀 3각관계의 수련기회로 삼는 건 어때?”

“그건 또 무슨……”

“그러니까 이런 거야. 너희 반 애를 소녀 A, 그 아까 나타난 애를 소녀 B! A는 선생님을 좋아하고 선생님도 A에 대해 호감이 있지만……”

“아, 누나!”

“계속 듣기나 해. 선생님은 A가 학생이니까 그걸 자각 못하는거야. 이때 B가 나타나지.”

“그리고 B는 원래 A를 좋아해서 선생님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A를 좋아하는건지 선생님을 좋아하는건지, 대체 왜 둘을 훼방놓고 있는지 이제 슬슬 헛갈리는 거죠.”

“그렇지, 그리고 B의 공작 때문에 선생님은 A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아, 젠장. 실사를 커플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악인것이냐. 물론 전에도, 누나가 H.O.T 실사 커플링 하는 것 보며 기겁을 했던 나였지만, 막상 그 대상이 되고 보니 이건 진짜 난감하다 못해서.

“그러지 말고 A랑 B를 모두 남자애로 설정한 뒤에, 우리 마태오를 총수로 만들면 어때?”

“꺄아, 그거 좋죠.”

“그러지 말고 직접 쓰지 그래, 응? 어때, 마태오 작가. 할 수 있지?”

늬들 다 죽었어어어어 하고 테이블째 들어엎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차가운 도시남자도 뭣도 아니고 그냥 누나에게 쥐어사는 가련한 한 마리 초식남일 뿐.

그런데다가 사실을 말하자면 같이 일하는 영아씨도 나한테는 누님 뻘이다 보니, 그야말로 나는 강성 동인녀 누님 둘에게 붙잡혀 완전히 사이드 디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웬 사이드 디쉬냐고? 반찬 말이다, 반찬. 그날 나 완전히 찬거리 되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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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6)

August 23rd, 2009

“7반 부담임 선생님이시죠.”

싸늘한 목소리였다. 뭐랄까, 나랑 무슨 삼대에 걸친 웬수라도 진 것 같은 그런 목소리라고 하면 과장이지만, 적대감이 넘쳐 흐르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디 가서 여자한테 웬수 진 일은 없는데. 하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 염천에도 빈틈없이 단정한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겨 뒤로 묶은 긴 머리카락은 보기에도 깔끔하고 청량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잠시 그 쉬는 시간마다 벌어지는 매점에서의 난투극이나, 내가 부담임을 맡은 반의 뒤에서 일어나는 말뚝박기나 돈치기, 애들이 숨어서 보고 있는 BL만화, 게다가 남자들의 독한 땀내와는 또 차원이 다른, 비릿한 땀내까지, 여기 온 이후로 산산히 깨져버린 내 이상이랄까 환상이랄까 그런 것이 떠올랐다. 그래, 이 학생은 그 깨져버린 이상에 흡사했다. 우리 학교에 이런 학생도 있었나 싶을 만큼.

“무슨 일이지?”

“이연지하고 너무 가까이 지내시는 것 같아서요.”

편애한다는 소문이 도는 걸까. 일단 내가 들어간 반에서는 본 적이 없는 학생인데.

“그럴만한 사정이 좀 있어서. 따로 편애하거나 그러는 건 아냐. 그럴만한 입장도 아니고.”

“연지가 요즘 눈에 띄게 선생님한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은 알고 계시죠?”

잠깐, 이건 내가 연지를 편애한다 어쩐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건가? 그러니까 저 여학생이 연지를 질투해서?

“……그런가.”

“그런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다가 연지가 성적 떨어지면 어쩌실거죠?”

뭔가 좀 이상한 전개였다.

“응?”

“저는 이과의 김지수인데요. 연지가 성적 떨어지면 안된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잠깐, 연지는 문과고 학생은 이과인데……”

“제가 이과 수석이거든요.”

그 지수라는 학생의 얼굴에 뭔가 분한 듯한 빛이 스쳤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 이연지에게 지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새로 온 총각 선생님한테 한눈이나 팔고 있는 이연지에게 지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과목이 다르잖아, 학생.”

“문과 이과 다르다고 등수 따로 나가는 게 어디 있어요!”

뭔가 좀 황당하긴 했는데.

“대학 가면 다 똑같은 과목 듣는 것 아니어도 등수 끊어서 장학금 준다면서요.”

“그거야 그렇지. 근데.”

뭔가 변명을 좀 해 두어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물론 내가 새로 온 총각 선생인 것은 사실이지만, 연지는 그런 이유로 나랑 이야기하는 게 아냐.”

“그럼 뭔데요?”

“에, 그러니까 말이지…… 코스프레 알지?”

“알죠. 이연지가 한달에 한 번씩 뛰러 다니잖아요.”

“그래, 고 3 수험생인데도 그러고 다닌다고, 담임 선생님께서 그래도 나는 젊으니까 그런 쪽 이야기가 통할 것 같다고, 이야기 좀 잘 해 보라고 하셔서 그래서 이야기하고 그러는 거야.”

“선생님도 덕후예요?”

“그게 아니라. 그래도……”

“덕후 맞네요.”

그 청순하고 단정한 얼굴에 살짝, 비웃음 비슷한 것이 돌았다.

“덕후가 자기가 덕후라는 것 봤어요? 그런데다가 곱게 임용고시 준비만 한 범생이 덕후라는 단어를 바로 캐치해서 알아들을 리 없잖아요?”

그래,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

“그런데다가 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연지가 선생님 보자마자 호모 아니냐고 그랬다면서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조각이 안 맞추어진다니까.”

그리고 제발, 그런 조각은 맞추지 말란 말이다! 하여간 연지와는 또 다른 의미로 미인이고, 그런데다가 청순단정하기까지 해 보이는 이 아가씨는 복어처럼 뺨을 볼록하게 부풀리며 고개를 휙 돌린 채 뭐라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근데 이제 수업시간 다 되지 않았어?”

“……그렇네요. 어쨌건 연지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꼴사나우니까.”

녀석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건물로 들어가버렸다.

다음 시간은 다행히 공강…… 이 아니라 수업이 없었다. 느릿느릿, 처진 듯한 발걸음으로 교무실로 올라갔다.

“3학년 이과 수석이 누구예요?”

“김지수? 왜?”

“아뇨. 연지 코스프레 하는 것 때문에 이야기 좀 길게 했는데, 그러자마자 와서는 연지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그러고 가서요.”

최 선생님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박장대소했다.

“웃지 마세요! 그, 그…… 첫날에 그 호모 운운한 이야기까지 해 가면서.”

“지수 걔가, 연지한테 좀 라이벌 의식이 있어요, 라이벌.”

“……”

“신경쓸 것 없어. 여자애들 그 또래 때, 같은 학교 여자애한테 좀 좋아하고 그러는 것 흔한 일이니까. 지수 걔가 말은 안 해도, 연지한테 좀 그런 게 있어. 그래서 마 선생이 연지랑 친하게 지내니까 질투하는 거지, 뭘.”

“그런가요?”

“그래, 정말 신경 안 써도 되니까 신경 꺼. 흐흐, 여자애들이 좀 복잡하지?”

“그렇네요……”

복잡한 것은 복잡한 것인데. 그래, 복잡하니까 문제인 거다. 어쩐지 끼어들기 귀찮은 여자들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클릭좀 해주세요 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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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요즘 잡담 끄적끄적끄적…..

August 22nd, 2009

1. http://deulmol.egloos.com/ 도자기 호연님의 블로그가 다시 문을 연 모양이다. 재능있는 사람이 아픈 것은 안타까운 일인데, 무사히 수술을 받으셨는지.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받으신 분들이 계신 듯. 안심입니다……

*

2. 월하동 6권을 자체생산해서 팔 때. 게시판 가득한 귀여운 닉네임들을 찍고 들어가 주소를 보면
…..군부대
…..남고
…..대학의 남자기숙사
등등이어서 가슴에 대형참사가 난 적이 있었는데 (가슴으로 울었다!) 뜻밖에도 임시대피소에 월하동 관련 스레가 있다는 제보가!!!!!

그리고 여담이지만, 주소 외부에 노출하지 말라고 그러는 그 임시대피소, 구글에서 쳐보면 바로 나온다. 노출이 싫으면 조금 더 면밀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 어쨌건 좋게 봐주시는 여자분들이 있어서 깜짝 놀랐음.

*

3. 목요일에 학산에 가봤습니다.
편집부에 가본 것은 아니고, 건물 1층은 커피숍, 2층은 서점. 잘 꾸며놓았던데요.

*

특히 인상적인 것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인기작, 화제작의 1권을 잔뜩 디스플레이 해놓고는, 1권 끝에 스티커를 붙여놓았더군요.
“2권은 2층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굿잡.

뭐 그게 문제가 아니고. 김진희 작가님이랑 같이 갔는데…… 대원에 계셨던 김차장님하고요.
파티의 팀장님을 뵈러 갔습니다. 이번에 그 로맨스 소설 만화화 한다고 잠깐 언급했었는데. 그 건이고요.
잘 될것 같습니다. 음, 음.

4. 요즘 끄적거리는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은 설덕질 안 하고 쓰려 했습니다만.

*

결국 데려왔습니다, 일반화학.
갖고있던 책이 워낙 구판이기도 했고, 지금 원룸으로 옮겨올 책과 아닌 책을 가르다가 보니 광에 들어가기도 해서. 그런 겸사겸사의 이유로 헌책방에서 한권 샀습니다.

같이 구입한 책은 “사람해부 실습지침”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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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here,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월하의 동사무소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5)

August 20th, 2009

“그래도 선생님인데,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좀 심했다.”

“제 말이 틀렸나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마도 상식적인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저 말에서 어느 부분이 듣는 사람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어영역 모의고사를 만점 받는다는 애가, 왜 그걸 모를까.

“뭐랄까, 선생님이 기대하는 예의라는 게 있잖니.”

“기대를 한다고 꼭 그대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기대는 기대일 뿐이지.”

뭐, 그건 그렇지만.

“그냥, 선생님들은 다들 선험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예전에 우리는 안 그랬다, 그런 식으로들 말씀하시잖아요. 근데 선생님들도 다 경험해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 뿐이에요. 생각해 봐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백번 양보해서 선생님들이 다 가난한 집 천재들이었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분들이 1%도 아니고 0.1%였으면요, 굳이 사범대학 안 가도 장학금 받고 다닐 대학은 있었을 거라고요. 그렇다고 그 선생님들이 죄 다 국립대 사범대 나온 것도 아니고.”

말은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긴 했다. 교대야 죄 다 국립이니 그렇다고 쳐도, 중학교 고등학교 선생님들이야 돈 없어서 사범대 갔다는 이야기는 정말 옛날 이야기인데. 참, 연세 있으신 선생님들 보시기에는 이녀석도 꽤 싸가지 없이 보이겠지만,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쯤해서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하나 들었는데, 이 녀석, 전교 1등, 그것도 전국 0.1%의 독보적인 전교 1등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선생들에게 까이고 밟혀 뼈도 못 추렸을 거다. 본인도 그걸 알 만큼은 총명하니까 뭐, 반박의 여지를 남길 만큼 행동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재미있는 거 아세요? 선생님들, 은근히 자기가 학교 다닐 때, 전국구에서 놀았던 것 처럼 생각하고, 자기들의 선생님들에게 천재로 취급받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저한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선생님들은 백이면 백이라니까요.”

“왜, 선생님들 중에서도 공부 잘 했던 사람 많지. 야, 오죽하면 교사 임용시험이 임용고사가 아니라 임용고시가 되었겠냐.”

“흐음.”

“지금 너 보기에야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거 시험 나름 어려워. 경쟁도 세고.”

“통계 봤는데, 뭐 30대 1, 40대 1, 그렇잖아요. 초등학교 선생님 시험은 2대 1, 3대 1이라고 그러고.”

연지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솔직히 2대 1 경쟁률을 두고, 경쟁 운운하기는 그렇잖아요.”

나는, 4년동안 교사가 될 훈련을 받은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 나온 애들이 교사 말고 다른 직종에 취직하기는 정말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마 이 녀석은 그렇게 말할 거다. 그러니까 교사가 되는 대신, 일반 화학과나 화공과보다는 덜 배우신 거잖아요, 라고. 안 봐도 비디오지. 나는 내가, 화학과에서 교직코스 밟아서 교사자격증 딴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이 앙큼하고 깜찍스런 녀석에게 놀림이나 당할 뻔 했으니까. 생각해 보면 교사 말고도, 다들 자기 전문성이 있는 전공을 하는데도 결국은 전공과 상관없는 진로를 택하게 되는 경우가 반이 넘으니까. 딱히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 나온 애들만 어렵다고 할 수도 없는 문제이긴 했다.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 천재였어요?”

“동인남이었어.”

“쌤은 솔직해서 좋아요.”

“……너도 아는 이야기니까 한 거지. 그리고 내가 지금,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들이 천재였던 척 한다고 까고 있는 판에 네 앞에서 나 천재였네 해서 본전이나 건지겠냐?”

“글쎄요.”

연지는 한 마리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쌤은 아직 모르죠. 일지도.”

“그건 또 뭐야.”

연지의, 긴 머리카락을 대충 묶어 올린 그 아래로 매끈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그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저렇게 자기 인생에 자신감이 충천하니, 자기가 예쁜 것도 아마 알고 있을 텐데. 이거 모에사(死) 시키려고 작정을 했구만. 이것저것 생각은 많고, 날은 덥고, 여기 그늘에서 한 걸음만 걸어나가도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아렸다. 유난히, 생각도 많고 답답한 여름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여름이.

“아무리 왕년에 천재였다고 해도 말이에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거잖아요. 날아야 문제지. 자기가 옛날에 그렇게 잘 나갔다고 그래도, 그거 따라가서 호구조사 해볼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그러면서 서로 자기들끼리 물고 빨고 핥는 꼴 보면 가서 확 까주고 싶어요.”

“뭐, 타고 났어도 적절히 뒷바라지를 못 받으면 재능을 죽일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쌤은 제가, 천재라고 생각해요?”

자, 잠깐. 나한테 이런 것 묻지 말란 말이다! 나는 사범대학에서 조신하게 4년동안 선생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화학과 다니면서 남는 학점으로 교사자격증 딴 것 뿐이란 말이야! 교육학이네 뭐네 다 듣기는 했지만!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확실하게 남들보다 똑똑한 녀석이 이런 것을 묻는데 대체 나보고 뭐라고 대답하는 거야!

“……잘 모르겠어, 아직.”

지금으로는 이게 최선이다. 이렇게 자의식 강한데다, 어쨌건 정말 똑똑하긴 똑똑한 녀석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 그런 건 나중에 최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되고. 그러니까.

“흐음.”

“뭐야……”

“아뇨,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연지는 눈을 반짝이며 웃다가, 고무공이 튀어오르듯이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색 플레어스커트가 바람에 살짝 팔락였다.

“마태오 작가도 좋지만, 선생님도 마음에 들어서요.”

“얌마…… 그 마태오 소리는 제발 하지 마.”

“그래서, 윌리엄 얼굴에 덮은 오이팩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대로 바로 덮치는 거예요?”

“……학교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오후 한 시의 햇살은 따가웠다. 그늘을 벗어나 햇살 속으로 달려가며, 연지는 소리내어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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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4)

August 18th, 2009

“……라는데?”

그리고 내 인생의 또 다른 에러는, 이런 문제를 함께 의논할 사람이 하필이면 우리 누나밖에 없다는 거다. 친구가 있으면 내가 이러겠나. 그래,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지. 제대로 살았으면 이런 일 의논할 친구가 문제가 아니라, 주말마다 방에 틀어박혀 남자끼리의 애#섹스 같은, 나로서는 그다지 해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나 줄창 써대는 대신 뭔가 좀 아름다운 미래 밝은 내일을 추구할 만한 취미생활을 착실히 키웠겠지.

“뭐, 안심해도 되겠지.”

“누나 생각에도 그렇지?”

“그래, 그 나이 또래 여자애들은 은근히 독점욕이 있어서. 나만의 오빠가 여러 사람의 오빠가 되는 거 용납 못 하는 애들도 적지 않을 걸.”

“그럼 가시오가피 걔넨 뭐야?”

“카시오페아? 동방신기? 당연히 독점욕 있지. 근데 팬들이 하나하나 독점욕 부리는게 결국은 ‘오빠’한테 어떻게 안 좋게 되는지, 이미 H.O.T와 젝키의 팬들이 다 겪고 지나갔어. 그러니까 나름대로 그 안에서 규칙 세우고 질서 잡고 하는 거지.”

그래도 누나가 또 이쪽으로는 빠삭하게 알아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다가 말고 누나가 그렸던 문희준과 강타와 토니, 세 명이 나오는 치정극 생각이 나면 어쩌라는 것이냐.

“뭐, 네가 아이돌은 아니지만. 어쨌건 네 팬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떠들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을 걸. 적당히 독점욕을 충족시켜 줄 만큼만 관리해 준다면 별 문제 없을거야. 근데 롤러코스터 콘티, 이번에 좀 늦네?”

나는 부지런히 연습장에 칸을 치며 대꾸했다.

“지난번에 한 화 당겨서 줬잖아.”

“선생 되었다고 바로 이렇게 늦어지는 것 봐라. 한두 번이면 그러려니 해도, 계속 늦어지면 안 되는 거 알지?”

“알아.”

“영아 씨가 언제 셋이 저녁 먹자더라. 너 취직 기념으로.”

“어, 누나가 알아서 해. 나 주말에 널럴하잖아.”

“네가 쏘는 거 알지?”

“나 거지라니까.”

어쨌거나, 일은 그쯤 해서 다 쉽게쉽게 돌아갈 것 같이 보였다.

“전교 1등이 말이야, 그래서 되겠어? 어?”

그러니까 복도에서, 태연하고 뻔뻔하고 유유히 ‘롤러코스터’의 제 2권을 들고 있다가 학주한테 딱 걸린 녀석을 보기 전 까지는 말이다.

“어디 이딴…… 어이쿠, 이게 뭐야.”

참고로 말해두는데, 그 롤러코스터는 1권에서 바로 반장이 원어민 강사를 더듬더듬하고 2권에서는 물론 실수라고는 하지만 시작부터 둘의 키스씬이며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니, 여자애가 어디 이런 걸 보고 있어. 딴 놈들도 아니고, 전교 1등 하는 녀석이 말이야.”

“근데요, 선생님.”

아아, 그래! 저거 스토리 쓴 내가 보기에도 벌건 대낮에 청순한 여학생이 들고 있을 책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직 동인녀 출신의 우리 누나가 맨날 콘티 가져가고 하는 것을 보다 보니 잊고 있었다. 저 만화의 타깃은, 우리 반 아이들같은 그런 여고생들이란 말이다, 여고생!

……청순한지에 대해서는 뭐, 조금 생각을 더 해 보긴 해야 겠지만.

“만화는 둘째치고, 전교 1등 전교 1등 하지 마세요. 그거 그렇게 기분 좋지 않아요.”

“뭐?”

“전교 1등이고, 전국 0.1%고, 그렇게 유쾌한 것 아니거든요?”

나는 반사적으로 포스트잇을 꺼내었다. 아니, 지금 상황이 솔직히 말하면 난감하기 그지없는 것이, 학주 선생님이 손에 들고 쓰레기같다고 욕하는 것은 분명히 말해 내 책이며, 내가 생각하기에도 여고생이 저걸 보고 있으면 뭐라 한마디 해주고 싶기는 한데, 그런데 그 와중에 연지 저 녀석은 반항까지 하고 있다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잇과 볼펜을 꺼낸 것은, 어떤 직감 때문이었다.

“서울대라고 애들이나 선생님들이나 다 뒤통수에 대고 그렇게 불러대는 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공부 잘 한다고 그러는 건데.”

“아니라고요?”

어떤 직감이냐 하면 말이다, 그래도 아무리 누나한테 맞아가며 쓰는 호모만화 스토리라고 해도, 기왕 쓰는 것 좀 더 재미있는 글을 쓰려고 취재라는 것을 하다 보니 생긴 어떤 뉴타입적 능력이랄까, 그런 건데.

“선생님은 0.1% 해 보셨어요? 전 해봤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이 맞죠.”

……대략 명대사를 주워올릴 만한 타이밍이랄까 그런 것 말이다.

물론 저,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을 유발시키는 대사를 앞에 두고 태연히 받아쓰기만 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뭐가 되었건 이젠 나도 선생인걸. 그건 그렇지만.

“선생님, 참으세요. 얌마, 넌 왜 또 만화책이야. 방학이라고 풀어지면 못 써.”

저런 아이가 있는 반의 진짜 담임이 되는 것은 또 나름 끔찍한 일이겠지만, 저런 아이를 보는 것은 그래도 나름 즐겁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학주가 최 선생님 찾으며 씩씩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좀 난감한 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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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해 놓았는데 쌀을 불려놓았던 것을 잊고 그냥 물을 더 부었더니 죽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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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3)

August 17th, 2009

“물론 나도 네이버에서 검색은 해 봤다. 여중생 애들이 남자의 반 이상이 호모가 아니냐고 생각한다든가 하는 말도 안 되는 글도 봤고, 호모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는 무시무시한 말도 보긴 봤어. 아, 그래. 동성연애자, 라고 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공정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야, 교육자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는데 하지만.”

“……그러니까 지금 그 변명을 제게 하시려고 저를 또 부르신 거예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녀석은 정말로, 이따위 일로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니라면 홀딱 반해버릴 것 같은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일로, 바쁜 고3을.”

만화는 아니지만 내 이마 옆으로 혈관이 우두둑 튀어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내 나이 아직 꽃같은 스물 넷, 벌써부터 고혈압으로 골로 갈 일 있냐! 나는 손을 저으며 그 녀석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간단히 끝내자. 난 남자를 좋아하는 취미는 없어. 그리고 내가 교사가 되기 전에 장난삼아 한두 번.”

“한두 번이라니, 말씀에 어폐가 있네요. 선생님 책만, 패러디만 13권, 창작지가 4권, 각색해서 키싱유에 연재한 게 2권 1질 완결, 그리고 지금 선생님 이름으로 스토리 쓰시는 것이 벌써 4권째 나가고 있잖아요.”

“……”

“그게 한두 번이이에요? 10메가의 전설이라고 부르면 모를까.”

“그건 딴 사람.”

“뭐가 되었건요. 그리고 그 패러디와 창작지를 합쳐서, 두 권을 제외하면 모두 남자와 남자의 격렬하다못해 귀축이라고 불러 마땅한 정사가 펼쳐지는데.”

“그, 그만!!!!!”

작가라면 당연히, 자기 글에 대해 누가 언급하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면전에서 귀축 귀축 해 대는 것은 당연히 끔찍한 일인 법이며.

“게다가 그 중에서도 정말, 하아…… 그 있잖아요, 선생님이 쓰신 그 수능에 나오는 한국문학 패러디.”

“그만둬어어어어!!!!!!!!”

“대체 메밀꽃 필 무렵을 허생원이 동이를 두고 그 첫사랑 그녀를 닮았다고 메밀밭에서……”

그것도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한 녀석이, 벌써 어언 6년 전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에 홧김에 썼던 그 고리짝때 소설을 꺼내서 나한테 전력으로 내던지면 어쩌라는 거냐!!!!!!!

“그것 뿐이에요? 김강사와 T교수 소설을 갖고 김강사가 H부장의 육노……”

미저리.

그렇다, 미저리에게 잡혀간 그 작가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참, 미저리가 아니라 애니한테 잡혀간 거지. 미저리는 그러니까 소설 속 여주인공이고. 하여간. 나는 그 순간 진심으로 죄와 벌이라는 말을 떠올렸는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셨네요. 괜찮으세요?”

“어떻게 하면 되겠어.”

“예?”

어쨌건 지금은 도리가 없다. 무릎을 꿇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거야 호쾌한 남자들에게나 어울릴 말이지, 나같은 가련한 중생에게야 어디 어울릴 법이나 한 말인가.

“얌마, 난 이제 막 교직에 들어온 교사란 말이다.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지 알아? 그런데 네가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난 어떻게 해? 교사나 공무원이나, 뭐 일반 회사 다니는 것 처럼 잘리고 그런 건 없다고 해도 평판 나쁘면 정말 힘들다고 그러는데, 시작하자마자 마선생이 호모래요 하고 소문이 나면!”

“어차피 저 좀 사이코라고 소문이 있어서, 바로 그렇게 소문나진 않을걸요?”

“어쨌거나, 그리고 그 책!”

“책 내신 건 사실이잖아요. 지금은 정식으로 책도 내고 계시고.”

“……다 좋은데, 지금 내고 있는 것도 어쨌건 남남상열지사잖아. 이런 것을 교사가, 그것도 남교사가 쓰고 있다고 그러면 다들 날 변태로 알 거라고. 그러니까 부탁이다. 제발 이런 이야기 어디 가서 하지 마! 설마 벌써 한 건 아니겠지? 응? 야!”

내 목소리는 거의 애원 조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나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문 낼 생각 없는데요?”

“뭐……?”

“소문을 왜 내겠어요. 마태오×정영아 콤비의 ‘롤러코스터’가 얼마나 인기있는데.”

“그게 무슨……”

“그런 인기인을, 다른 애들이랑 공유하고 싶겠어요? 중학교 때, 선생님 아직 동인
일 때부터 팬이었는데.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소문은 안 낼 테니까.”

“……”

“대신, 선생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건 괜찮죠? 1주일에 하루씩만 점심 같이 먹어요. 그렇게 해주실 거죠?”

추천 꾹! 해주시면 도움이 좀 될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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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2)

August 13th, 2009

“그런 이유로 블로그를 없애겠다는 거냐?”

탁, 이번 호 키싱유로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가, 마치 5.1 채널로 들려오는 곤장 맞는 소리처럼 장대하다.

“바보같은 놈!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우악스러운 누나의 목소리가 귀를 찔러대었다. 아니, 이 아줌마는 숫제 내 귀를 확 끌어당겨 붙잡고는, 귓속에 대고 숫제 고함이다.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그래도 남아로 태어나 죽기 전에 할 말은 해야 하겠기에, 나는 저항했다.

“누나가 날 언제 키웠다고 그래!”

물론 무의미한 저항이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 사실을 뒤통수에 날아든 키싱유 신간이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으니.

“으악!”

“얌마, 여덟 살 차이면 업어 키웠다고 해도 믿어!”

“그러니까 누나가 나한테 언제 그랬느냐고!”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했지만, 반란은 10분도 지나지 않아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러니까 오마니, 먼저 누나를 낳으셨으면 왜 저까지 낳으셨느냐고요. 저는 저런 우악스러운 누나가 아니라 예쁜 여동생 쪽이 좋았단 말입니다. 예, 오빠에게 남남상열지사 만화책을 들켜놓고도 뻔뻔하게 네가 나 책 사는 데 보태준 것 있느냐고 오히려 소리부터 지르고 보지 않을 그런 참한 여동생요.

“웃기지 마. 고작 그 정도 일에 블로그며 홈페이지 다 문 닫겠다고?”

“……그럼 어쩌라는 거야.”

“어이, 무슨 교직은 천직이자 사명감 어쩌고로 선생이 된 것도 아닌 주제에 참 뜻밖이다?”

물론, 처음에 품은 뜻 그대로.

아니, 조금 업그레이드도 되었다고 해야 하나.

교사를 지망한 까닭은 팔할이 방학이요, 나머지 이할도 착실하게 여교사나 여자 공무원을 꼬셔서 젊어서는 중소기업 사장 커플 소리 들으며 포시랍게 살기 위함이며, 은퇴 후 노후가 어느정도 쓸만하겠다 싶으면, 20년 근속 채우자마자 은퇴해서 셔터맨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 이거다. 어디보자, 지금이 스물 넷이니 20년 채우면 마흔 넷. 그때부터 인생을 즐기고 살아도 뭐, 쓸만한데. 교사 마누라 얻어서, 마누라가 정년까지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살면 나는 그 동안 가사를 돌보고 아이들 잘 키우며 현부양부 모드로 생활하는 척 하며 나 좋은 일들 하고 살면 되는 것이지. 그게 내 장래 희망이다. 놀멘놀멘 놀면서 사는 것. 꿈을 좀 업그레이드 해 보자면, 요즘같은 불경기 난세에 교사만 해도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그러는데, 이왕 이렇게 된 것 어디 목좋은 건물에 괜찮은 약국 하나 차린 아가씨를 만나서, 진짜로 셔터맨이 되어서 살면 얼마나 좋아. 좋지, 욱일약국 갑시다 책에서 읽은 그대로 집에 올 때 마다 택시를 타고 그 약국 이름을 대는 거야. 웨이 포인트 하나 찍는 거지, 이 동네에다가. 그런데.

시작부터 이건 뭐. 난관도 이만저만한 난관이 아닌 것이다.

“훗, 마동진. 네가 그러면 뭐 달라질 것 같아? 이미 한녀석 알았으면, 온 학교에 소문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야. 그냥 걔 하나 잘 토닥거려서 문제 해결하든가, 아니면 그냥 참고 살아. 대체 요즘 세상에 취향이니까 존중해 달라는 말 한 마디 못 하냐?”

“난 이미 호모로 찍혔다고!”

“그래서 뭐.”

“그래서라니! 누나는 이 집안 장손인 내가!”

“어차피 너 24년동안 여자 손목 한 번 제대로 못 붙잡아 봤잖아. 아니, 어허, 내 손목 빼고. 다들 그렇게 게이가 되어 가는 거지.”

“누나!”

“됐어, 듣기좋은 말도 삼세 번. 이미 그쪽에는 흥미가 떨어져서.”

뭔가, 키싱유의 간판이라고 쓰고 BL이라고 읽는 작품 세 개를 다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 치고는 참으로 뭣하긴 하지만.

“이제와서 네가 남자랑 어쩌고 다닌다고 버닝할 것도 아니고.”

“그 문제가 아니잖아!”

“어쨌건 내비 둬. 삭정이불은 들쑤실수록 커지는 법. 근데 여자애 어때? 예뻐?”

참, 어디선가 구렁이 한 마리가 담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예쁘긴 했어.”

“너 옛날 책도 갖고 있다며. 근데 서코에서 본 적도 없어?”

“부스 뒤에 그냥 숨어있잖아. 얼굴 볼 겨를이 어디 있어.”

“좀 잘 해 봐. 혹시 아냐?”

“뭘 혹시 알아. 젖비린내 나는 고삐리한테.”

“젖비린내 좋아하네. 너 2월생이니까, 너랑 다섯 살 밖에 차이 안 나. 나랑 너 차이나는 것 만큼도 안 나는 거잖아.”

“……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전교 1등에 서울대 유력하다며. 그런데다가 네 그쪽 취미도 잘 이해해 주겠네. 어쩌면 네 인생에 다시 없을 고퀄리티의 여자애일지도 모르니까 잘 해보라는 말이야.”

“됐네요, 전교 1등은 매년 한 명씩 나오거든?”

나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근데 미인은 미인이더라.”

“잘 되었네.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란 언제나 완전 소중한 법이지. 그 기세를 살려서 이번 화야말로 한번 끝내주는 러브신을 넣으면 어때? 지난번 그 어학실 반응 좋던데. 카페 봤어?”

“……그런 일을 들키고 러브신을 넣으란 말야?”

“어. 그냥 심한 건 말고.”

“어느정도 수위?”

“제라르와 자크 정도?”

“누나!”

아아.

역시 여자는 요물이로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남자를 사귀어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여전히 요만큼도 없었다. 다만,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누나같은 여자와는 절대 사귀면 안 될 것이요.

교사가 되어서 교사나 약사, 혹은 여자 공무원과 결혼해서 셔터맨이 되려면 지금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이 악의 물리같은 여자애의 관심을 어떻게든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일단은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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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라르와 자크.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로, 프랑스 혁명기 평민 지식인 출신으로 레즈물을 전문으로 쓰는 에로 작가인 제라르와, 파산한 백작의 아들로 제라르의 하인이 된 자크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 쓰다듬 하고 성장하며 사랑에 빠지고 역사의 격랑에 휘말…… 리는 내용인 것은 틀림없지만 일단은 18금을 달고 나왔다. 그러니까 그 수위를 이슈나 윙크같은 잡지에 싣는 것은 좀 곤란한 노릇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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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11)

August 10th, 2009

토마토 분식집에는 동네 아줌마들이 그득그득했다. 별 수 없이, 그 옆에 있는 용우동에 들어가며 나는 옆 가게를 자꾸 흘끔거렸다.

“저기가 500원 더 싸서 그래요.”

“아, 그래?”

“여기요, 참치김밥이랑 쫄면이랑….. 뭐 드실 거예요?”

“……아무거나 시켜.”

“그럼 참치김밥이랑 쫄면이랑 철판볶음밥이랑 주세요! 아, 여기 선불이에요.”

이 녀석아, 난 아직 월급도 못 받은, 백수 때가 아직도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인간이란 말이다. 수트에 넥타이만 새 것이지 알맹이를 따지고 보면 이달 17일까지 난 빈티 풀풀 날리는 거지란 말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쩌겠어. 빳빳한 세종대왕님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지. 아, 모자라서 500원짜리 하나 더 냈던가. 하여간.

“아까 갑자기 호모 이야기부터 꺼낸 것은 정말 죄송해요.”

애가 뜻밖에도 순순히 사과를 해 오네?

뭔가 좀 수상쩍긴 했지만, 그래도 학생이 사과하는데 선생이 되어서, 대인배적인 넓은 마음으로 오케이 해 줘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사과하는 태도가 안 되어 있네 어쩌네 한바탕 더 하는 경우도 있기야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아웃팅하는 것은 실례인데.”

“아, 아웃팅?”

잠깐, 너 그거 사과는 맞는 거야? 아니, 진심으로 아웃팅이라 생각하는 것을 보면 사과는 진짜 사과인데, 어째 번지수가 좀 많이 이상하다?

“잠깐, 네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마태오 선생님.”

“응?”

어라?

……응, 하고 대답한 순간 이녀석, 웃네? 웃어? 대체 뭐가 좋다고 웃는 거지? 하는데 갑자기 뭔가가 뒤통수를 뻑, 하고 때리고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뭐, 뭐가 역시라는 거야!”

“아, 뭐가 역시냐 하면요.”

연지는, 폰에서 사진을 뒤적이더니 어디서 많이 본 책 표지 사진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낸 책은 다 봤어요. 마태오 선생님.”

지져스, 운명이다.

이녀석, 대체 전생에 나와 무슨 웬수를 졌길래!

“특히 최근에 선생님이 낸 그 제뉴도터 귀축……”

“그만둬어어어어어어!”

“봐요, 부정할 생각도 못 하고 있잖아요.”

대체 무슨 웬수를 졌는데, 이런 식으로 남의 과거지사를 까발리면서 상큼하게 웃고 있는 거냐아! 아아, 그래. 선생 같은 것 하는 게 아니었어. 그냥 나같이 더럽혀진 놈은 평생 썩은 뇌나 줄줄 흘리면서 살았어야 하는 건데. 남자가 BL이나 좋아하니 이런 개같은 꼴을 다 당하는 거야. 으아아아아, 차라리 죽을까. 죽어버릴까. 교사가 된 첫날부터 이게 무슨!

“보통 사람 같으면요, 멀쩡히 마동진이라는 이름 놔두고 갑자기 마태오라고 부르는데 대답 안 해요. 그렇잖아요?”

“……”

“그런데다가요, 갑자기 귀축 어쩌고 하는데 그런 티나는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다고요. 선생님 책 예전부터 수집하고 다녀서 이런 쪽으로는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으셨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아직 순진하시네요?”

“……너!”

“하아, 이해할 수 있어요. 아직은 성적 소수자에 대해 편견이 많은 우리 나라, 그나마 공무원이나 교사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해고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열심히 하셨겠죠. 정말 경의를 표하고 싶어요.”

“이녀석아아아아!”

나는 그만, 부임 첫날, 온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좌시장 앞 용우동 구석자리에서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성적 소수자라니, 난 호모가 아니란 말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

그야말로 자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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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