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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화학반응(30)

September 23rd, 2009

“어이, 마 작가.”

“……”

“마태오씨, 지금 뭐 하시나.”

그러니까 나는, 백지 연습장을 앞에 두고 장장 30분째, 멍하니 면벽만 하고 있었다.

물론 그걸 그냥 곱게 두면 우리 누나가 아니긴 했지만, 아무래도 내 상태가 심각해 보였는지.

“얌마, 마동진.”

그냥 흔들어만 볼 뿐, 바로 폭력이나 협박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나는, 멍한 눈을 들어 누나를 돌아보았다. 어째 누나가, 무슨 젤리에 감싸여 둥둥 떠다니는 듯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향정신성 의약품이라고는 반경 10미터 안에 들여놓지도 않았는데.

“누나.”

“왜.”

“그거 누나 반지.”

멍하니 멀게 보이는 누나에게서, 손에 낀 반지만이 도드라져 보였다.

“어디서 샀어?”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물론 여기서 곱게 물러난다면 우리 누나가 아니지. 만약에 그랬다면 지금 눈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나가 아니라, 어디 안드로메다 외계인이 누나를 잡아먹고 둔갑을 하고 앉아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현명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뭐야, 반지라니. 어떻게 된 거야?”

그 괴악한 질문을 듣자마자, 우리 누나의 작은 잿빛 뇌세포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설마 그, 너희 반 여자애 갖다주려는 거야?”

“……”

“난리났네, 난리났어.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정신 차려, 넌 선생이고 걘 학생이야.”

뒤통수를 치는 손은 여전히 매웠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픈데도, 정신은 여전히 멍했다.

“마태오 작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야? 콘티 짜야지. 정신 차려.”

“세이브 해놓은 거 있잖아.”

“야, 글은 습관이야. 하루 안 쓰면 그만큼 감 떨어지는 거 몰라서 이래? 앉아, 일어나. 일어나서 좀 써라. 야!”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고백이라도 받았어?”

“……어.”

“뭐래?”

“자기 말만 들으면 셔터맨 만들어 주겠대.”

누나는 듣고도 기가 막혔는지 눈을 깜빡였다.

“셔터맨이라고?”

“그렇다니까.”

“걔는 뭘 하고?”

“걔, 원래 이과에서 탑으로 놀았는데 문과 가서도 전국구래. 젠장. 자기 말로는 서울대 경제학과 가겠다고 그러고 있더라. 법대가 아니라.”

“그래서 사업 한다고?”

“몰라, 하여간 자기는 투자하고 그럴 건데 적더라도 꼬박꼬박 월급 받는 남편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니 나한테 자기 말듣고 40세에 은퇴해서 셔터맨으로 살아보라고 그러더라. 그게 다야.”

생각해보니 한심한 이야기였다. 아니, 물론 내 꿈이긴 하지, 셔터맨. 하지만 그게 스물 네 살 먹은 건장한 청년에게 제시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돈을 이만큼 벌어주겠다거나, 뭘 어떻게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무슨 사업을 차려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하필 집에서 놀고먹는 셔터맨을 미끼로 나를 공략하려 들다니. 낚일 뻔 한 것도 사실은 사실이지만, 생각할수록 어쩐지 괘씸했다.

그런데.

“그거 네 꿈이잖아?”

어째 누나는 빙글빙글 느물느물,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더라 이거다.

“왜, 좋잖아. 셔터맨. 요즘 세상에 누가 아침밥 살뜰히 차려먹어. 늦잠 자는 거야, 늦잠. 아침에 아내가 출근을 하면, 너는 애들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커피 한 잔 내려서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그것도, 무슨 동서 커피 문학상 홍보멘트로 쓰면 딱 맞을 시추에이션을 멋대로 설정하더니 신이 나서 읊어대는 것이, 어지간히 재미있긴 재미있는 모양이지. 나는 혀를 찼다.

“동생이 곤경에 처했는데 그렇게 즐거워?”

“어, 그럼. 근데 반지는 뭐야.”

“수능 백일반지 해달라는데.”

“해달란다고 알아보는 거 봐라. 너도 마음 없으면 그렇게 되냐.”

“됐고, 그거 어디서 했어? 얼마래?”

“홍대 앞에 있어. 매드라고…… 금은 아니고.”

“근데 누나는 이거 반지 뭐야? 남친도 없으면서.”

“그냥 지나가다가 마음에 들어서 하나 사 꼈어. 왜.”

“이런 거 끼고 다니니까 남자가 더 안 꼬이지. 커플링같잖아, 딱 봐도.”

“시끄럽구나.”

물론 교사가 되어서, 학생이 해달라고 보챈다고 다 해주는 것은 절대절대 안 좋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안 해주려고 생각하면 할 수록 자꾸 떠오르는 거다. 입술에 닿던, 그 살짝 열이 오른 듯한 뜨거운 부드러움이. 그 생각만 하면 공연히 낯이 벌개지고 숨이 막혀서.

“……또 왜 그래?”

“아, 아니.”

진짜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선생이고, 그녀석은 학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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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군 그와 그녀의 화학반응

  1. 미리암
    September 23rd, 2009 at 23:10 | #1

    …2009년 입시부터 로스쿨 제도로 인해 서울대를 비롯해서 모든 대학이 법대를 모집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문과에서는 서울대 경영학과가 탑인걸로 알고있습니다.(저는 이과 재수생이구요..;;) 관용적으로 사용하셨는지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교사가 법대를 언급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2. September 24th, 2009 at 02:41 | #2

    와우. 그러면 그거 본문에 반영해야겠네요. :-) 앞으로 몇화 뒤라든가!

  1. September 24th, 2009 at 00:03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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