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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그녀석들의 발렌타인데이

February 13th, 2009

“너무하잖아.”

기계과 학생회장, 이제 3학년 올라갈 예정인 박관석은 대놓고 입을 댓 발은 내민 채 끊임없이 투덜거리기만 했다. 두어 걸음 앞장서서 올라가던 키가 작은 여학생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관석을 돌아보았다.

“대체 그러니까 뭐가요?”

“뭐라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 좀 해 봐.”

“2009년 2월 14일 토요일이죠. 덧붙여 오늘 아침 8시 31분 30초에 유닉스 타임으로 1234567890초가 지나갔어요. 나름대로 우리 컴과에는 역사적인 날인데, 왜요?”

“……난 기계과잖아.”

관석은 여학생의 머리에 손을 텁 하고 얹으며 앞으로 추월해 나아갔다. 작기는 작네. 이녀석은 키도 안 자라나. 이러니 대학생 나이에 중딩 취급이나 받고 말이야.

“야, 월미도.”

“왜요.”

“왜요는 왜놈의 이부자리가 왜요라고. 아니, 넌 여자애가 2월 14일 하면 뭐 떠오르는 것도 없어?”

“3월 14일은 파이 데이인데 2월 14일은 뭐 있어요?”

“얌마……”

아니, 그래도 중딩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너무너무 잘 알겠지. 관석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한심한지 알 수 없는, 전산과 2학년 서월미 학생을 붙들고 한숨을 푹푹푹 쉬기 시작했다.

“발렌타인 데이잖아, 발렌타인 데이! 이런 날은 역시, 사귀고 좋아하고 그런 사이 아니더라도 나하고 너처럼 이렇게 서로서로 사이좋게 상부상조하며 잘 지내는 선배와 후배라면, 뭐랄까, 그냥 가나 초콜릿 한 토막이라도 갖다주면서.”

“……의리초코?”

“그렇쥐.”

“관석이 오빠.”

“응?”

“그러니까 얼마나 일본 야겜을 많이 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는 한국이라니까.”

“야, 일본 야겜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친구한테도 초콜릿은 주더라!”

“아, 이런 거 말이죠?”

월미는 등에 메고 있던 큼직한 책가방을 한 팔에 걸치고, 지퍼를 열었다. 가방 속에는 고디바 한 상자에, 틀림없이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초콜릿에, 이것저것 초콜릿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관석은 반색했다.

“그래, 바로 이런 것!”

“이런 것 말이죠오……”

공학관을 벗어나 공대 계단을 내려갔다. 월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학관 꼭대기 탑까지 올라가야 하니까 뭐, 이대로 계속 걸어도 되겠지만. 월미는 가방 가득 들어있는 초콜릿을 보여만 주고 그냥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야, 월미도.”

“……”

“서월미.”

“……”

“얌마.”

“가서 먹어요, 가서.”

하다가 월미는 가방을 벗어 내밀며

“아니면 가방이라도 들어주든가.”

하고 퉁을 놓았다. 관석은 가방을 받아들었다. 어쨌거나, 초콜릿 한 조각 얻어먹기도 더럽게 힘든 세상이다. 각박하기도 하지. 백화점 이마트 홈플러스까지 갈 것도 없다. 바로 교문 건너 거스름돈 수퍼마켓만 가도 발렌타인데이라고 커다란 바구니에 리본을 달고 중국산이건 인도산이건 초콜릿을 가득가득 쌓아놓았는데.

어째서 공대는, 그 흔한 가나 초콜릿 한 조각 못 얻어먹어서 말이야.

“아, 너…… OT 갈 거냐?”

“……제가 왜요?”

“전산과 집행부가 순 사내놈들밖에 없잖아. 너라도 가 줘야, 새내기 여자애들도 좀 안심을 하고 그러지. 여자애들만의 뭐야, 좀 민감한 문제들도 있고 그렇잖아. 너네 집행부랑 사이 나쁜 것도 아니고. 연이도 있으니까 뭐.”

“그러니까 전산과 집행부에 여자가 없는 것을 왜 기계과 학생회장님이 걱정하시는데요.”

“……”

“그러니까 제 블로그.”

“……됐다.”

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월미의 블로그 이야기가 나오면 관석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여간 이 한심한 선후배는 이학관 5층까지 올라가서, 다시 10층까지 이어진 계단으로 올라가 맨 꼭대기에 있는 대수경실 문을 열고 들어갔으니.

“어, 왔어?”

화공과 대학원생 황철 선배에다가, 전산과 학생회장 이연 선배, 그리고 월미의 동기이기도 한 전자과 윤태우가 사이좋게 모여 월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미는 가방을 열고, 노트북 컴퓨터와 프랭클린 플래너만 먼저 빼 놓고는 나머지 내용물을 그대로 책상 위에 탈탈탈 털어놓았다. 책상 위는 그새 초콜릿으로 수북하게 뒤덮였다.

“올해는 비싼 게 많네?”

태우는 얼른 고디바를 집어들었다가 연이의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책상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다리가 불편한 태우 대신 연이 일어나 물을 끓이고, 지난번 진 교수님이 가져다 주신 홍차를 넉넉하게 우려내었다.

“응, 오빠가 좀 고생했거든.”

“오빠?”

그나마 월미가 초콜릿을 가져올 것이라는 이야기 정도는 들은 연과 달리, 관석은 오빠와 초콜릿이 무슨 상관이 있나 싶어 눈을 깜빡거렸다. 월미는 꽃장식과 비닐에 꽁꽁 싸인 초콜릿을 풀어놓으며 대답했다. 테이블 구석에는 어느새 쓸모없는 꽃장식과 레이스 장식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큰오빠요. 우리 큰오빠. 샘승 SDS 다니는.”

“근데?”

“……큰오빠가 매년 초콜릿을 이만큼씩 받아와서. 작년에도 불우 공대생이나 돕게 내놓으라고 하니까 이만큼 줬거든요. 그때야 연이 오빠하고 관석이 오빠는 군대 있었으니까 못 얻어먹었지만.”

월미야 뭐 매년 보는 풍경이니 태연히 말했지만.

“근데 우리 오빠도, 정작 여자 사귀는 것은 영 서투르다 보니 사귀면 뭐 제대로 되어 가는 게 없는데, 그래도 발렌타인마다 이만큼씩 걷어들이는 것 보면 구르는 재주는 있단 말이에요. 음? 관석 오빠 뭐 해요?”

평생 소원이 여자친구 사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꽃도 부끄러워할 스물 네 살 청춘에 여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기계과 학생회장 박관석은 그대로 바닥을 파헤치고 9층 8층 7층으로 내려가 그대로 지하실까지 뚫어버리고 싶었다. 인생. 공대 나왔으면 공대 나온 인생답게 여자와 인연없이 살란 말이다. 무슨 공대 출신의 샘승 SDS가 발렌타인마다 초콜릿은 초콜릿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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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말로 대한민국의 승리라 할 수 있겠지.”

교수실 문 앞에 가득 붙어있는 초콜릿과 장미꽃을 떼어내며, 진시형 교수는 중얼거렸다. 진 교수의 제자인 김치국 조교는 라면박스에 초콜릿을 정리해 담으며,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혀 시들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는 저 대단한 교수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대한민국의 승리요?”

“그렇다네. 발렌타인 데이를 초콜릿 주는 날로 대대적으로 퍼뜨린 것은 일본이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설치고 다녔던 것은 다름아닌 롯데였거든.”

“……”

“자네도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가지.”

“……괜찮습니다.”

“음? 이건 홍대 앞에 새로 생겼다는 초콜릿 샵의 상자인데. 어디. 생초콜릿이로군. 얼른 정리하고 들어오게. 차 끓여놓을 테니.”

“교수님.”

“음?”

“……발렌타인에 초콜릿 하나 못 받은 것은 서럽습니다만, 그렇다고 오늘 같은 날 교수님과 티타임을 갖는 것도.”

“무슨 문제라도?”

“……”

“……음?”

“……아닙니다. 차 끓이십시오.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지요.”

“그래.”

진 교수는 주머니에 비스듬히 손을 찔러넣은 채 미소지었다.

“저녁때는 대수경반 아이들이라도 불러야겠군. 오늘도 다들 나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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